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7일

소련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산풀내음 2016. 12. 2. 14:11

1945년 1월 27일,

소련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1945 127, 20세기의 치부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다. 소련군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700kg이나 되는 머리가락, 사람의 골분(骨紛),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의치와 안경태였다. 5kg으로 1000명을 살상할 수 있는사이클B’ 가스가 사용된 흔적도 발견됐다.

 

1940 4 27, 처음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오시비엥침(독일명으로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소가 세워졌다. 이는 나치가 세운 6개의 강제 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가장 악명이 높은 수용소였다이 수용소는 원래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이 폴란드인을 수용하려고 세운 곳이었으나, 구 소련의 전쟁 포로를 포함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수용하게 되었다. 이곳은 1942~1944년에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과 살인을 당한 현장이었다.

 

원래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이 후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절멸 수용소로 개조, 확대되어 제2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가 만들어진다. 이 제2 강제수용소가 독가스실에 의한 유태인 학살로 유명한 곳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Farben사는 이곳에 화학공장을 설립하는데 이를 위해 제3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건설되었다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제1과 제2가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이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학살 강제수용소의 정문

 

1940 6월 폴란드 정치범 수용을 시작으로 유대인을 포함하여 폴란드, 집시, 러시아인, 프랑스인, 체코, 네덜란드인 등 독일로부터 미개 인종으로 분류된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주로 범죄자, 나치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 이상자,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등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순혈주의에서 낙오자라고 판단되는 독일인들이었다특히, 독일이 점령한 모든 지역이나 독일의 동맹국에서 체포된 유태인들은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로 수송되었다.

 



 

나치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용소 인원을 정리하였다. 처음에는 총살 후 매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이었기에 총알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무리가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처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나아가 다양의 총알을 쏜 병사들은 아픔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이었고, 1941 9 3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11블록 지하실에서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태인 250명이 독가스에 의해 처음으로 처형됐다. 이것은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최초의 독가스 처형으로 이후의 유태인 대량학살에 대비한 실험적인 성격을 갖는다. 독가스 처형은 밀실 징벌 구금실에서 행해졌다. 처형은 통상 1회에 약 2000명씩을 대상으로 했다.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는 유대인들

유대인에게 압수한 안경태들



유대인에게 강탈한 금반지들

 

1945 1월 27 소비에트 연방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고 그 때까지의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을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을 한 것이었다.

 

수용소를 해방시킨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며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포함하여 약 100만에서 15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