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9일

매카시의 반공산주의 선풍

산풀내음 2016. 12. 12. 21:59

19502 9,

매카시의 반공산주의 선풍

 

1950 2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열린 공화당 여성당원 대회에 초청된 연사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 상원의원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폭로했다. 후에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 불리게 된, 사상 희유의 빨갱이 사냥을 위한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메카시의 주장은 미국 사회에 엄청남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이 크게 여론에 부각되자 상원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매카시가 폭로를 계속할 때마다 그 숫자도 늘어났다. 신문들은 매카시의 폭로를 사실여부에 관계 없이 헤드라인으로 삼았으며 매카시의 폭로를 다룬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 덕에 매카시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확고하게 늘려나갔다.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열린 비미활동위원회 (非美活動委員會,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공개 청문회 풍경

 

하지만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애초부터 없었다. 석 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 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저명한 중국학자 라티모어를 필두로 애치슨, 마샬 등 민주당 정부요인들까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비단 매카시 뿐은 아니었다. 초선의 공화당 의원이었던 리처드 닉슨도 이에 가세했다. 정부와 의회, 학계, 문화계, 노동계, 헐리우드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게 된다. 그리고 1952년 공화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양당 모두 매카시즘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집권한 공화당은 매카시즘의 필요성이 급락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1954 3 9 CBS의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에서 앵커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 1908 4월 25 ~ 1965 4월 27)가 매카시의 주장들을 개별적으로 추적해 대부분 근거가 없는 주장임을 폭로했다. 이는 메카시의 몰락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방송 이후 하룻동안 CBS에 접수된 12,000건의 전보전화 중 머로우를 지지하는 비율이 15 1이었다.

 

에드워드 머로(Edward R. Murrow)

 

한편 매카시는 미국 육군 내에 친공세력과 간첩들이 득세하고 있다며 육군을 공격하였다. 해당 청문회에서 육군 장군들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자 당시 대통령이자 2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인 아이젠 하워는 크게 분노하였다.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즈비커 준장의 혐의와 관련해 19544월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단 한 건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변호사들의 논박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곧이어 1954 122일 상원은 67 22로 공화당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의원 44명 전원과 공화당 의원 절반(22), 유일한 무소속이던 오리건 주 웨인 모스 의원이 매카시의 의정 활동이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 67 22로 매카시 불신임안이 통과됐다안건은 매카시의 의회와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모독과 모욕, 자금 유용 의혹 등이었지만, 그 직전 매카시가 미 육군 뉴저지 킬머캠프 지휘관 랄프 즈비커(Ralph Zwicker) 준장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것이 계기였다.

 

매카시는 그후 비서와 결혼했으나 술에 빠진 생활을 계속, 3년 후인 1957년 실의 속에 알코올 중독증과 우울증으로 48세 나이에 죽었다. 한 정치신인의 야욕과 사회의 불건강한 정신구조가 함께 빚어낸 한 시대 우화였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기는 힘들다. 수백 명이 수감되었으며 1만 명에서 1 2천 명이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경우 위원회에 소환되거나 혐의가 제기되었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었다. 동성애 혐의도 매카시즘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취업이 거부되었다피해자 중 대표적인 유명인으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매카시즘 선풍에 걸려 미국에서 쫓겨난 찰리 채플린. 위 사진은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의 한 장면. 그런데 바로 이 영화가 매카시즘이 문제삼은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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