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0일

국토건설단 창단

산풀내음 2016. 12. 12. 22:14

19622 10,

국토건설단 창단

 

1960 11 28일 장면 총리는 미취업 대학생과 인력을 구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를 총리 직속으로 설치하고 청년 교육, 국토 건설 사업,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5.16군사 정변 후인 1962 2월 10 국토건설본부는 국토건설단으로 명칭을 바꾸어 재창단되었다. 하지만 2공화국 당시의 설립 취지와는 달리 불량배들과 군 미필자의 강제 징집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당시의 명분은 전국토의 유기적, 효과적 개발을 도모함과 동시에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도모하기 위해 국토건설단이 창단됐었고, 이 건설단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 수행에 따른 장기개발사업에 필요한 집단노동력을 운영하면서 군 미필자를 일정기간의 노력 봉사 후 병역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1 2조의 정책이라는 것이었다.

 

1961 12 2일 공포된 국토건설단설치법에 의하면 국토건설단은 국토건설총장을 단장으로 동청에 설치하며 기간요원과 건설원으로 구성한다. 신분이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기간요원은 예비역중 지원자중에서 임명하며, 건설원은 28세이상의 방역미필자와 징병적령자로서 징집면제자 등에서 편입하기로 되어있는데 이들 건설요원의 근무연한은 18개월이며 지원자에 한해서는 12개월로 되어있다.

 

울산공업지구의 국토건설단 발대식 장면

 

1차년도 건설원의 동원은 1962 315일부터 415일까지 2단계로 구분하여 총 1 6,224명이 편입되었다. 1962 2월에 4개 지단과 3개 분단이 편성되었고, 3월에 3개 분단과 28개 건설대, 4월에 11개 건설대가 편성 완료되었다. 국가공무원인 기간요원(基幹要員)은 예비역 장병 또는 특수기술지원자를 중심으로 국토건설사업에 헌신적으로 종사할 것을 자원한 자로 임명하였다. 기본인원 편성은 지단본부는 88, 본단본부는 40, 건설대는 기간요원 18명과 건설원 416명 등 434명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활동내용으로는 우선 제1지단은 진주 남강댐 공사(2,158명 투입)와 섬진강댐 공사(908)에 투입되어 진입도로 23km와 이설도로 32km, 방수로(放水路) 16km의 공사를 담당했다. 2지단은 춘천 소양강댐 건설공사(1,390명 투입)와 춘천댐 건설공사(868명 투입)에 투입되어 진수로 2km의 공사를 담당했다.

3지단은 태백산 지구 '예미' '정선'간 철도 42km와 산업도로 38km의 공사를 담당했고, 울산공업 센터 공사도 추가 담당했다. 산업도로에 1,794, 정선선 철도에 3,166, 울산 공업지구에 2,210명을 각각 투입했었다. 5지단은 영주와 점촌간 경부철도 58km의 공사에 4,943명을 투입했다.

 

이러한 국토건설단의 활동은 국가가 추진한 사업으로 다목적 수자원개발 및 대간척지 개발사업, 특정지역 종합개발사업 등 사회간접자본의 형성 등 고도경제성장의 중요한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토건설단은 수많은 양민들 특히 5.16 쿠데타 반대 인물들을 불량자로 낙인찍어 강제 노역(대표적인 것은 제주 동서를 가르는 5.16도로 건설)에 보냄으로써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도 있었다. 국토건설단은 비인간적 반인륜적으로 운영되었다. 그 결과, 살인적 폭력과 감정적 개인린치 등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사람을 죽어나가게 만들었다. 그와 같이 전두환도 권력찬탈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위협할 방편으로,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해 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삼청교육대라는 기구를 강제한다.

 

당시의 제주도에는 이른바 '5.16도로'와 제주도 상수원인 '어승생댐'이 국토건설단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제주도 국토건설단은 병역미필자가 아니고, 주로 혁명정부의 ‘5대 사회악’ 제거에 의하여 검거된 폭력배들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제주도민의 상수원인 '어승생댐' 공사장의 경우 건설부가 주도했고 입찰로 선정된 삼부토건이 저수지 본공사를 맡는 한편 5.16 직후 전국 각지에서 검거된 폭력배 등으로 구성된 국토건설단이 도수로와 송수관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제주에 도착한 국토건설단과 5.16도로

 

1968 624일 부산에서 1진으로 도착한 폭력배 등 171명과 제주출신 39명 등 210명에 이어 29일과 30 2진과 3 280명을 포함, 도합 510명이 1025일 해단식 때까지 4개월간 공사에 동원됐다. 이들은 '어승생댐' 공사장과 제2횡단도로 건설현장에 투입됐는데, 빈번한 집단탈주 등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손으로 건설된 제주도의 5·16도로는 한라산 동녘 기슭을 관통하는 제1횡단도로로 첫 삽을 뜬 것은 1962 3 24일이었으며, 이듬해 10 11일 비포장 상태로 개통했고, 10 19일부터 16인승 버스가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왕복했다. 그리고 4년만인 1966년에는 교량 14개와 도로 40.43㎞를 4m폭으로 포장하여 전면 개통하였다개통 당시의 도로 이름은 '횡단도로'였으나, 정부는 5.16을 기념하고 역사에 정당성을 남긴다는 의미로 1967 4월 그 명칭을 '5·16도로'로 변경했다.

 

당시의 국토건설단 활동은 조직편제나 인적 구성이 군대식으로 이루어져 국가에 의한 노동력 동원과 통제라는 부정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운영면에서도 갖가지 물의를 빚어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1962 11 30일 정부방침에 따라 전원 귀향 조치되었고 건설단도 자연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