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2월 24일,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입적
한국 근대 불교사의 대표적인 개혁운동가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백용성 스님이 1940년 2월 24일 입적했다. 1864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스님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종, 법호는 용성이다.
1911년 서울로 올라와 한용운 스님과 함께 포교활동을 벌이던 스님에게 왕실의 한 상궁이 내 준 집은 스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이곳을 대각사로 이름지은 스님은 1916년 처음 이곳에 자리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주석처로 삼았다.
스님이 대각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하여 3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1922년부터였다. 그는 `대각교당`이란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적 색채가 점점 짙어가던 불교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일제가 불교계를 황폐화시키려고 주지 자격에 비구계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3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에 비구승만이 법맥으로 면면할 따름이요, 대처-육식을 하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없노라"며 1926년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 건백서’를 제출했다. 건백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대각교` 운동을 공식 선언하고 기존 불교 교단에 자신의 승적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백용성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옥중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반입해 읽고 있는 신앙서적들이 한글로 씌어진 것을 보고 불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도 힘써 `조선글 화엄경`(1927년)을 비롯해 30여 종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을 한글화했다. 또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일요 불교학교를 운영하면서 직접 오르간을 치기도 했다.
"생산하지 못하는 종교는 흡혈적 종교요, 사기적 종교"라고 생각한 그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며 경상남도 함양과 만주 용정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많은 자금을 보내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일행은 대각사를 찾아서 이에 감사했다. 대각사는 또한 백용성 스님의 법맥을 잇는 `용성 문중`의 큰 집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백용성 스님은 동산·동헌·자운·고암 스님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두었다. 용성 문중은 만공 스님의 법맥을 잇는 `덕숭 문중`과 함께 불교 조계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용성 스님의 제자들은 물론 성철·혜암·광덕·능가 스님 등 그의 손자뻘되는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모두 대각사에서 지낸 시절을 갖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으며, 국가보훈처에 의해 199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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