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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입적

산풀내음 2016. 12. 23. 19:53

19402 24,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입적

 

한국 근대 불교사의 대표적인 개혁운동가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백용성 스님이 1940 2 24일 입적했다. 1864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스님은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종, 법호는 용성이다.

 

1911년 서울로 올라와 한용운 스님과 함께 포교활동을 벌이던 스님에게 왕실의 한 상궁이 내 준 집은 스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이곳을 대각사로 이름지은 스님은 1916년 처음 이곳에 자리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주석처로 삼았다.

 

스님이 대각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하여 3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1922년부터였다. 그는 `대각교당`이란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적 색채가 점점 짙어가던 불교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일제가 불교계를 황폐화시키려고 주지 자격에 비구계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3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에 비구승만이 법맥으로 면면할 따름이요, 대처-육식을 하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없노라" 1926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 건백서를 제출했다. 건백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대각교` 운동을 공식 선언하고 기존 불교 교단에 자신의 승적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백용성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옥중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반입해 읽고 있는 신앙서적들이 한글로 씌어진 것을 보고 불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도 힘써 `조선글 화엄경`(1927)을 비롯해 30여 종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을 한글화했다. 또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일요 불교학교를 운영하면서 직접 오르간을 치기도 했다.

 

"생산하지 못하는 종교는 흡혈적 종교요, 사기적 종교"라고 생각한 그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며 경상남도 함양과 만주 용정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많은 자금을 보내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일행은 대각사를 찾아서 이에 감사했다. 대각사는 또한 백용성 스님의 법맥을 잇는 `용성 문중`의 큰 집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백용성 스님은 동산·동헌·자운·고암 스님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두었다. 용성 문중은 만공 스님의 법맥을 잇는 `덕숭 문중`과 함께 불교 조계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용성 스님의 제자들은 물론 성철·혜암·광덕·능가 스님 등 그의 손자뻘되는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모두 대각사에서 지낸 시절을 갖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으며, 국가보훈처에 의해 1998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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