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6일

일본 ‘2ㆍ26 사건(February 26 Incident)’

산풀내음 2016. 12. 24. 22:50

19362 26,

일본 ‘226 사건(February 26 Incident)’

 

일본 육군 내부에는 통제파(統制派)와 황도파(皇道派)라는 두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이들은 이념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빈번하게 충돌하였다. 두 파는 모두 군부가 일본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대신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면서 전쟁준비를 위한 국내체제 확립과 서구열강에 맞서는 고도국방국가(高度国防国家)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통제파라고 한다면, ‘황도파는 육군대신이었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일본군을 ‘황군(皇軍)’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는데, 이들은 군부 쿠데타로 정당과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일왕(日王) 친정의 군국(軍國)국가로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제파가 주로 참모본부, 육군성 등 중앙의 참모장교로 이루어졌다면, 황도파는 위관급의 청년장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황도파는 끊임없이 군부 쿠데타를 도모했다. 1934 11월에는 무라나카(村中孝次), 이소베(磯部淺一) 등이 사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결행하려다가 통제파에게 발각되어 미수로 끝난 이른바 ‘사관학교 사건’도 발생했다.

 

1935 8월 육군대신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황도파의 수장이었던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 교육총감을 파면한 뒤 통제파였던 와타나베(渡邊錠太郎)를 임명했다. 이와 같이 통제파가 황도파를 요직에서 내쫓으려 하자 이에 격분한 대만(臺灣) 보병 제1연대 소속의 아이자와 사부로(相澤三郞) 중좌는 1935 8 12일 도쿄에 있는 육군성에 들어가 육군소장 나가타 데쓰잔(永田鐵山) 군도(軍刀)로 살해했다.


그리고 1936 1 28일부터 제1사단 사령부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특별변호인 미쓰이(滿井佐吉) 중좌는 이 사건이 군부 내에 확산되고 있는 국가개조운동의 한 단면이라면서, “이 사건을 잘못 처리하면 제2, 3의 아이자와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결국 1936 2 26일 새벽, 22명의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1,400여명의 사병들을 이끌고국가의 전면적 개조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226 사건이었다. 장교들은 내각을 습격, 다카하시 대장상과 사이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수상관저와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다. 한편 스즈키 시종장은 관저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키노 전 내대신은 손녀딸 가즈코의 처세로 목숨을 건졌으며,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은 외출 중이어서 살아남았다.

 

사건 당시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27일에는 도쿄에 계엄령이 시행됐고, 28일에는 이들에게원대복귀명령이 내려졌다. 29일에는 24천여명의 군병력이 이들을 포위, 선무방송과 비라살포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천황에 의해 반란군으로 단정됐다는 소식에 동요하기 시작한 사병들은 대부분 원대복귀했으나 장교단 중 주모자 노나카 시로 대위와 안도 대위는 자결하였고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2 29일 오후 다섯시가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 해 7월에 현역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고 민간인으로 참가했던 기타 잇키도 처형되었다.

 



Marines from the Imperial Japanese Navy were brought in to help crush the February 26 coup

계엄령 발효 후 계엄사령부 설치

하사관과 병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