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6일

민주공화당 창당

산풀내음 2016. 12. 24. 22:53

19632 26,

민주공화당 창당

 

1961 10월 말 정보부 정책연구실 연구위원인 윤천주 고려대 교수와 김성희 서울대 교수 등은 구정치인의 집권을 막으려면 혁명 주체세력이 집권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김종필에게 제출했고 김종필은 12월에 박정희에게 보고해 신당 창당에 대한 승낙을 얻어낸다.

 

당시는 혁명정부의 포고문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매우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1962 1월 말 종로2가 뒷골목에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간판으로 사무실을 냈다. 여기에서 정보부 이영근 차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예춘호 부산 동아대 강사, 황정모 서울대 교수, 서인석 뉴욕타임즈 서울특파원, 윤주영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이 재건동지회에 동참했다.

 

1962 4월부터 선발된 창당요원들은 종로구 낙원동의 요정 춘추장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1962 8월 하순 박정희 당시 의장이 춘추장에 처음으로 들러 교육 진행 과정을 점검하기도 했다.

 

1963 1 1, 정치활동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고 1 10일부터는 창당작업을 공개하고 본격적으로 발기인을 선정했다. 처음 당명은 가칭 재건당이었다가 1 18민주공화당으로 확정지었다. 이때 민주공화당의 작명은 얼마 전 1 7일 창당작업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장을 그만 둔 김종필이었다. 그는 미국의 양대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름을 합친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마침내 민주공화당이 1963 2 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당총재에 정구영씨, 당의장에 김창열씨를 각각 선출했다. 두차례의 혁명을 이어 받아 새 노력의 양심과 협동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지닌 민주주의적 지도세력을 이룩하겠다고 내세워 정치활동 금지조항 해제 후 57일 만에 제일 먼저 창당을 선언했다.

 


1969.8.30 민주공화당 임시전당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정당의 이름인 민주공화당은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름을 합한 것이었다. 박정희 의장의 민정불참과 김종필씨의 사퇴로 불안정한 당내사정을 그대로 안은 채 열린 이날 대회는 1,896명의 대의원 중 1,319명의 참석으로 개회했다.

 

김동성, 김용우, 김성진씨 등 임시의장단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창당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당체제를 2원제로 하고 사무국 권한이 강력한 전문 62조의 당헌을 약간의 혼란 끝에 통과시키고 또 6개항의 총령과 7개항의 기본정책을 각각 채택했다. 8 31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입당하여 총재직을 맡아 권위주의적 지도체제 아래 계파갈등을 억누르고 조직, 선전 등을 전문화, 당료화시켜 강력한 대중정당체제를 지향해 나갔다. 이후 민주공화당은 경제개발과 안보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1인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민주공화당은 이후 17년 동안 집권당으로 군림했지만 1979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종필을 새 총재로 삼아 재건의 몸부림을 쳤으나 19080 10 27일 헌법 부칙에 의해 자동 해산됐다. 국내 정당사상 최장수 정당이었다.

 

1963 1 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육군 준장으로 전역한 김종필 전 중정부장에게 1등보국 훈장 통일장을 수여하고 있다. JP는 신당 창당을 위해 중정 부장직을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