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7일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산풀내음 2016. 12. 24. 23:12

19332 27,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1933 2 27일 밤 9 14분 독일 국회의사당(Reichstag)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최초의 목격자는 국회의사당을 지나가던 한 대학생으로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즉시 화재를 신고했지만 베를린 소방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사당이 불타고 있었다. 화재는 소방차 100대가 출동하고도 자정이 지나서야 진화됐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소방대와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경찰은 불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발화된 사실을 확인하고 주변을 수색 중 건물 뒤에 발가벗고 움츠려 숨어 있는 반 데르 루베를 발견했다.

 

한편 한참 화재 진압 중에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당시 국회의장)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 등이 현장에 도착했고 괴링은 현장을 보자마자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고 선언했다. 괴링의 이 선언으로 화재 사건은 수사도 하기 전에 공산주의자의 방화로 그냥 굳어졌다.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 감상 중에 같이 현장으로 혼 괴벨스도 그의 일기에서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장에서 체포된 24세의 네덜란드 출신 공산당원 반 데르 루베는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다. 하지만 한편에선 나치스가 3월 실시될 총선거에서 반대세력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방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었다. 한달전인 1 30일에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선동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해 독일에는 제3제국이라 불리게 될 나치스 체제가 막 출범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기회를 잡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인권 조항을 대부분 폐지하는 비상사태법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는 방화사건 발생 다음날 이 사건을 독일공산당의 계획적 범행이라고 공표하고 `국민과 국가를 방위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포해 언제라도 공산당원을 추방, 처형할 수 있게 했다.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유재산과 우편통신의 비밀, 그리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 보장이 일시 중지됐고 공산주위자들의 신문은 선거 때까지 폐간됐으며 의심스런 공산주위자들의 회합장소는 폐쇄됐다. 결국 이 법령에 의해 공산당원 4천여명이 체포됐으며 공산당 의원 81명 전원도 체포되거나 추방됐다.

 

그 결과 히틀러는 3 5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다시 93석을 추가해 44%의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목표였던 과반수에는 못 미쳤기 때문에 우파인 국가인민당과의 연립으로 3 23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키며 일당 체제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나치 이외의 모든 정당은 해체되고 연방정부는 폐지됐다. 비판적인 인사들은 추방되거나 체포돼 8월까지 약 4 5,0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됐다.

 

방화범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안이 방화사건 이후에 통과돼 방화범의 처형은 불법이었지만 루베는 1934 1 10일 처형됐다. 이 날은 그의 25번째 생일을 3일 남겨둔 날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나치스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설과 소영웅주의자 루베의 단독범행이라는 설이 여전히 팽팽하다.

 

법정에서 고개숙인 방화범 공산주의자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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