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4일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 취임

산풀내음 2016. 12. 29. 21:59

19333 4,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 취임

 

1933 34, 32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 날의 주인공은 4개월 전 현직 대통령 후버와 맞서 선거인수 472명대 59명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 1월 30 ~ 1945 4월 12) 였다.

 

 

대공황 타개책으로 공화당의 후버가 자유방임을 내세운 반면 루스벨트는 국가의 적극 개입을 주장, 국민들을 설득시켰다. 국민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루스벨트는 광장을 가득 메운 10만의 군중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라며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루스벨트의 리더쉽은 뉴딜 정책을 통하여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벗어나도록 도왔으며,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에 동참하여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에 대한 미묘한 자세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의 결성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 미국인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상위에 위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주어진 최고의 시대적 소명은 대공황 탈출이었다. 1929 10, 미국에 휘몰아친 이른바검은 목요일은 미 전역에 경제불황과 사회불안을 야기시켰고, 국민들을 무기력과 절망으로 내몰았다. 1930년에 400만이던 실업자가 800(1931) 1200(1932) 1500만 명(1933)으로 급격하게 늘어났고, 1932년 한 해 동안 뉴욕에서만 95명이 굶어 죽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선 줄

세계대공황 중 미국에서는 사회보장법이 제정될 때까지, "soup kitchen" 혹은 "breadline"이라고 불리는 사설 구호소가 일부 실업자들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위 사진의 soup kitchen은 시카고의 有志 카포네가 운영하던 것이다. (출처: 사회보장국)

뉴욕에서 빵을 얻기 위해 선 신 줄, 이를 Breadline이라 했다.

 

루스벨트는 먼저 은행 휴무령을 내려 긴급은행구조법안을 통과시킨 뒤 건실한 은행만 문을 열도록 했다. ‘뉴딜(New Deal)정책을 연이어 발표하고, 라디오방송으로는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취임 후 100일 동안 15개의 혁명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경기부양과 실업대책의 기틀도 마련했다.

 

39세에 소아마비에 걸려 1945 63세로 숨질 때까지 24년간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았지만,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4선을 기록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New Deal)

 

뉴딜(New Deal)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32대통령1933~1936에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이다. 1932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루스벨트는 "아메리칸 사람을 위한 뉴딜"을 약속했다. 뉴딜이라는 용어는 1932년 초반에 출판된 스튜어트 체이스의 책 《뉴딜》에서 따온 것이다. 뉴딜(New Deal)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스퀘어딜(Square deal:공평한 분배 정책)윌슨 대통령의 뉴프리덤(New Freedom:새로운 자유 정책)의 합성어이다.

 

 

1) 1차 뉴딜정책

 

1932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확고한 우위를 점하면서, 루스벨트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본을 얻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즉각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루스벨트는 임기의 "처음 백일" 동안 주목할 만한 일련의 정책을 내놓았다. "처음 백일" 동안 의회는 루스벨트의 요구를 모두 승인하였다.

 

1933년의 "첫 번째 뉴딜 정책"은 경제의 전반적인 단기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루스벨트 행정부는 은행개혁법, 긴급 안정책, 일자리 안정책, 농업 정책, 산업 개혁(NRA, 국가경제회복기구), 연방 차원의 복지 정책을 추진, 금본위제금주법 폐지 등이다.

 

루스벨트는 모든 은행에 1933 3 6일부터 9일까지 휴가를 명령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때까지 은행 폐쇄 조치를 유지시켰다. 긴급은행법 입법안은 3 9일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 입법안은 같은 날 의회의 승인을 받아 법이 되었다. 긴급은행법에 따라 연방의 자금 지원과 재무부의 감독 아래에 건전한 은행 영업이 재개되었다. 이후 3일 동안 연방준비제도 가맹은행의 4분의 3이 영업을 재개하였다. 축적되어 있던 수십억 달러의 통화와 금이 한달 동안 이들 은행으로 흘러 들어와 은행 시스템이 안정되었다. 1933년 한해 동안 소형 지역 은행 4004개가 파산 당하거나 대형 은행에 합병되었다.

 

3, 4월에 의회의 법률과 루스벨트의 연방집행명령으로 미국 달러금본위제는 중단되었다. 금본위제 하에서 연방준비제도는 화폐 가치 방어를 위해 이자율을 높일 수만 있었을 뿐, 이자율을 낮출 수가 없었다. 금본위제를 금지하는 것과 관련된 법령에는 연방집행명령 6073, 6102, 6111, 긴급은행법, 1933년 은행법, 양원공동결의 192호가 있었다. 금본위제 폐지에 따라 금화 소유자는 금화를 미국 달러로 교환하도록 강제 당했다. 그리고 정부는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지급하지 않았다.

 

 

2) 2차 뉴딜정책

 

"두 번째 뉴딜 정책"(1935~1936)노동 조합 지원책, 공공사업진흥국(WPA)의 안정 프로그램, 사회보장법, 소작인농업 분야의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농부들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들 정책을 위헌으로 판시했다.

그러나 국가경제회복기구(NRA)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유사한 정책들로 교체됐다. 사실상 제2 세계 대전의 시작과 함께 뉴딜 정책은 마감됐다. 1943년 10 루스벨트가 말한 대로 "뉴딜 선생"(Dr. New Deal) "승전 선생"(Dr. Win the War)에게 길을 양보하고 물러났다.

 




뉴딜의 상징 후버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