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6일

김종원 치안국장, 판사를 향해 법정 모욕

산풀내음 2016. 12. 31. 22:00

1957 3 6,

김종원 치안국장, 판사를 향해 법정 모욕

 

1957 3 6일 김종원 치안국장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과 관련해 서울지법에서 법정증언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때 헌병사령관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불법 연행했고, 거창양민 학살사건 국회 조사단 방해 책임자였던 김종원(별명 백두산 호랑이)은 약 20분동안 저격사건 피고들인 이덕신, 최훈, 김상붕 등이 자기를 근거없이 사건관련자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비난하며 판사를 향해 "공정한 재판을 하시오" 노발대발 고함을 쳤다.

 

그는 "법정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일개 판사이지만 나는 과거에 헌병사령관을 지냈다. 얼마든지 할 테면 해봐라"며 법정모욕을 일삼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재판장이 법정모욕죄를 선언하고 퇴장을 명령했으나 고함을 치며 퇴정을 거부했다. 재판부가 6일 후인 3 12일 김종원을 서울지검에 법정모욕죄로 고발하자 국민들은 재판부의 결정에 열렬히 호응하며 지지했다.

 

살인마이며 이승만의 똥개인 김종원은 192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일본군 하사관으로 자원 입대하여 필리핀 전투에 일본군으로 참전하였다. 김종원은 당시에 필리핀에서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인육을 먹으며 버텨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잔인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살인마 김종원()과 독립운동가의 탈로 위장한 인간 쓰레기 이승만(), 이승만은 자신과 비슷한 쓰레기들을 특히 아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경찰이 되었는데 부하 경찰과 체포된 사람들에게 심하게 폭행을 하는 등으로 여러 번 보직에서 해임되는 등 파면의 위기에까지 직면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김종원은 광복군 출신 국군 초대 사령관인 송호성의 배려로 남조선 국방경비대원이 된다.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당시 파견된 김종원은 부역자 처벌 과정 등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일본도로 목을 베고, 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사격시험을 하듯 죽였다.

 

여순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

 

이후 빨치산 토벌에도 가담했고, 1950 3 14일에는 영덕 중곡동에서 김종원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3명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처형당하던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자 이에 분노한 김종원은 보고 있던 33명 가운데 31명을 학살했다. 1950 5 30일 김종원 부대는 빨치산을 토벌하고 퇴각하다 거제시 마전동 공동묘지에서 43명을 집단 학살했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 7 15일에는 김종원 부대에 의해 보도연맹원 160여 명이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학살당했다. 이후에도 그의 학살은 계속되었다.

 

평북 의주 출신인 최덕신(1914-1989)이라는 자는 지리산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소위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수립한다. 이는 중국군 백승희 장군이 항일전 당시 쓰던 전술이었다. 이 작전에 따르면 전략적 거점은 견고하게 쌓고, 나머지 인원과 물자는 모두 불태우고 철수해 사실상 적이 어떤 물자도 노획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적을 말려 죽이는 작전이다. 산간지대에서 물자가 부족한 빨치산을 대상으로는 최적의 작전이지만, 산간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작전이었다. 자신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곳곳에서 주민들을 향한 학살이 빈번하게 이어졌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주역인 최덕신은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여 5.16 직후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3 8 9, 서독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통일원 고문, 한중일보 사장 등을 지내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을 그렇게도 싫어한다고 했던 그는 1986 4 아내 류미영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갔다. 그리고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냈다.

 

최덕신의 11사단은 1950 11월 전북 남원에서 90, 12월 함평에서 524(함평학살사건), 1951 2 7일부터 9일까지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123)과 방곡마을(210)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에서 62,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310명 학살했다. 이를 산청·함양 학살사건이라 한다. 이어 거창으로 넘어간 이들은 9일부터 11일까지 신원면에서 719명을 학살했다. 거창학살사건이다. 그리고 3월 김종원이 산청군 외공리에서 500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으로 인해 내륙지역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이 중 거창학살사건에서 용케 생존자가 있었다. 생존자는 11사단에게 학살당한 사실을 알렸고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현장에 내려왔다. 김종원은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위장해 현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을 기습했다. 빨치산을 토벌한 그가 빨치산 시늉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작전은 곧 들통 났고, 김종원은 징역 3년 형을 받게 된다. 사단장인 최덕신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김종원과 최덕신 등이 이런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빗대어 ‘골로 간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곧 골짜기로(골로) 끌려가 죽는다는 말로써, 한국전쟁 시기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이후 ‘골로 간다’는 말은 손쉽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부하들도 서슴없이 죽였다. 그는 즉결처분을 즐겨 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영덕에서 23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 영덕 남방의 고지를 빼앗기자 고지 탈환 명령을 내렸다. 소대장이 고지탈환에 실패하자 소대장과 사병 1명을 즉결 처분했다.

 

그의 작전능력은 형평 없었다. 1950 7, 영덕을 빼앗기고 전투에 무능하고 부하들을 죽이는 행동을 했는데 이것으로 김종원은 23연대장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다음달인 1950 8월 김종원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헌병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는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김종원이 부산에 있을 때 그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 일도 많았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아꼈고, 1952년에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한 김종원을 특별사면하고 경찰 간부로 채용한다. 김종원이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 군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특히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김종원 석방을 놓고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고 초안을 마련했다. 초안에는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 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후 김종원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을 거친 후 1956년에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 격인 치안국장을 지냈다. 경찰에 있을 때도 그는 말썽을 일으켰다. 순시 도중 파출소장의 계급장을 떼어 내 안면이 있는 순경에게 달아주고, 부하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찰서장을 폭행하기도 했다. 경남경찰국장(경남지방경찰청장 격) 시절 참모회의장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힘들다’는 말을 듣자,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56. 7. 27.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두한이 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1956 9 28일 오후,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면 부통령은 총탄에 왼손을 다쳤다. 민주당원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이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던 중 구속된 이덕신이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다’고 폭로했다. 김종원은 이를 극구 부인했으며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고하던 시절이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승승장구하던 김종원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은 1960 4· 19혁명이었다. 그를 아끼던 이승만이 망명하고 그를 지켜줄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시 장면 부통령(당시 국무총리) 피습사건에 대해 재조사가 이뤄졌다. 김종원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왔고 결국 김종원도 피습사건을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종원은 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감했고, 1963 12 7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1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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