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2일

북한 이수근 판문점서 귀순

산풀내음 2017. 1. 19. 21:23

1967 3 22,

북한 이수근 판문점서 귀순

 

자유가 그리웠소. 김일성은 오늘밤 분해서 편히 못 잘 것이오.”

 

1967 322, 북한의 고위 언론인이었던 이수근 중앙통신 부사장이 극적으로 북측 지역을 탈출하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오후 5,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군사정전위원회가 끝나자 이수근은 재빨리 UN군 대표였던 밴 크러프트의 세단 승용차에 올라탔고 40여 발에 이르는 북한 경비병의 사격을 피해 귀순에 성공했다.

 

 

한국정부는 그가 북한의 국영통신사의 거물급 직책에 있던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남한에서 대학교수와 결혼하였고, 중앙정보부에도 특채되었고 반공강연을 하면 남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처조카인 배경옥(당시 29)과 함께 19691 27일 행선지를 태국으로 하여 김포발 홍콩행 CPA기에 탑승하여 홍콩으로 출국했다. 이씨 등은 도쿄, 타이페이를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 험프리 호텔에서 2일간 머물다가 캄보디아로 행선지를 변경하고,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다음날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공항에서 이들을 체포하려 했으며 서로 격투가 벌어지자 홍콩 경찰이 이들을 연행하였고,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특권에 의해 즉시 석방되고 이씨와 배씨는 억류되었다.

 

 

이씨는 홍콩 당국에 정치적 망명과 캄보디아행을 주장하였고, 홍콩경찰은 131일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 편으로 이씨 일행을 출국시켰다. 이씨 일행이 경유지인 베트남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하여 기내에서 출발을 위해 대기하던 중 중정 월남(베트남) 책임자인 주월 한국대사관 이대용 공사가 대사관 직원과 함께 기내에 들어가 이들을 체포, 대사관에서 보호조치 하다가 이날 밤늦게 C-54 한국공군기 편으로 한국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7 3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던 이수근이 조선노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으로부터 위장 월남 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 3 22일 판문점을 통해 월남 귀순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수근은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2007 1 15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아래 진실화해위원회) "지난달 전원위원회를 열어 인권침해사건인 이수근 간첩 조작의혹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중정)는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과거 중정 자료와 직원들을 면담 조사한 결과 "중정 직원들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중정에서는 위장귀순 여부를 신문하고 판단관 회의를 거쳐 자진귀순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이수근한테는 간첩에게 필수적인 암호명이나 난수표 등도 없었고, 북한으로 보내고자 모스크바 교회로 발송했다는 비밀편지 또한 난수표에 의해 암호화된 것도 아니었으며, 국가기밀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967년 당시 이수근이 운전기사나 감찰실 직원들의 동향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외부활동이 어려웠고, 따라서 국가기밀 탐지행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봤다. 특히 출국 당시 제3국 생활에 필요한 도구(영한사전, 한영사전)를 소지했고, 홍콩 도착 후 직접 마카오와 구룡반도를 경유해 주중북한대사관으로 탈출할 수 있었는데도 제3국인 캄보디아 행을 고집했던 것은 이수근이 중립국에서 살려고 했다는 점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형 39년만인 2008 12 19일 이수근이 간첩으로 몰린 사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즉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이 상소를 포기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었다.

 

또한 이수근의 탈출을 도운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1989 12월 석방된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89년 처음으로 문제 제기된 이수근의 간첩 논란은 이로써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됐다.

 

2008 12 19일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배경옥 선생

 

앞서 이 사건은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월간조선 1989 3월호에 보도한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문제 제기됐었다. 재판부는 1980년대 후반 조 대표가 3년에 걸쳐 취재하던 도중 만난 홍필용 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이대용 전 사이공 공사, 김기완 전 중앙정보부 정보부국장 등의 인터뷰 내용을 판결의 근거로 인용하기도 했다. 조 대표 역시 월간조선 기사가 보도된 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었던 A(육사 8)에 의해 명예훼손죄로 고소돼 검찰 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