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8일

스페인 내전(1936.7 ~ 1939. 3)의 사실상 종결

산풀내음 2017. 1. 27. 01:47

1939 3 28,

스페인 내전(1936.7 ~ 1939. 3)의 사실상 종결

 

1939 3 28일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2 8개월간을 끌어온 스페인 내전이 사실상 끝났다. 대부분 지역이 이미 반란군에 점령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마지막 보루 마드리드를 지키는 인민전선 내부의 갈등이 패배를 재촉했다. 결사항전파와 교섭을 통한 전쟁중단파 간의 대립은 급기야 결사항전파를 프랑스로 내몰았고 전쟁중단파는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 ‘학살병기의 실험장등으로 불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것은 1936 7 17.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튿날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가 쿠데타를 선언하면서였다.

 

1936 2월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인민전선이 정교 분리, 농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펼치며 중산층과 노동자·농민의 지지를 받자 가톨릭과 지주·자본가들은 불안해졌고 이 틈을 이용한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곧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태세였지만 민병들의 거센 저항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비롯한 55개국에서 모인 4만 명에 달하는 국제의용군국제여단이 인민전선에 합류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정규군이 반란군에 가담함으로써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 세계적인 지성들도 인민전선 지원에 나섰다. 사망자만 30∼60만 명, 망명자가 25∼50만 명을 헤아렸다.

 

스페인 내란의 정치적·감정적 여파는 한 국가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은 각기 자국의 관점에서 스페인 내란을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파시즘과 자유, 혹은 공산주의와 문명 사이의 국제적 갈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있어서 스페인은 새로운 모델의 탱크와 비행기 등 자국의 군비를 시험하는 장소가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에 있어서 스페인 내란은 자신들이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제적 평형상태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공화파 수병

스페인 내전 장시 정부군이 소련에게 지원 받은 T-26전차

1936년 바르셀로나의 무정부주의자 시민군

무정부주의자 시민군

17세의 공산주의자 전투원 마리나 기네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