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0일

미국 프로농구 NBA 선수 마이클 조던, 팬들에 작별인사 신문광고에 게재

산풀내음 2017. 3. 4. 20:52

2003 4 20,

미국 프로농구 NBA 선수 마이클 조던, 팬들에 작별인사 신문광고에 게재

 

 

사랑하는 농구에게(Dear Basketball).”

20일자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LA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 신문엔농구 황제의 고별사가 전면 광고로 실렸다. 2003 4 17(한국시각)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원정경기를 끝으로 통산 15년간의 미 프로농구(NBA) 활동을 마감한 마이클 조던(Michael Jeffrey Jordan, 1963 - ) 4 20일 신문광고를 통해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보낸 것이다. 스타가 유력 신문들의 전면 광고를 통해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데, 광고에 소요된 비용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던은나의 NBA 인생은 분명히 끝났지만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며 은퇴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도 계속 농구인으로 남을 것임을 암시했다. 미국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팬을 확보했던 조던은우리집 주차장 뒤편에서 부모님의 소개로 당신(농구)을 처음 만난 지 벌써 28년이 흘렀다당신은 나의 인생이자 열정 그리고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밝혔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시절 상처를 입고 울기도 했다던 조던은 1982년 미국대학농구(NCAA) 챔피언전에서 조지타운대학을 상대로 천금의 결승골을 성공시켜 6362로 역전승을 거둔 순간이 농구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음을 회고했다.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소도시 윌밍턴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보냈다. 그는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이 되어 주전선수에 뽑히기를 기대했으나 당시 178cm의 그리 뛰어나지 않은 농구선수였던 조던은 주전선수 선발에서 탈락하고, 코치는 201cm의 키를 가진 동급생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를 주전선수로 발탁했다. 그리고 조던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당한 좌절감과 질투심에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라고도 전해진다. 결국 1년을 기다려 선발된 그는 점차 키가 커지고 실력이 늘기 시작, 결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들어간다.

 

1984 NBA 전체 드래프트 3번으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한 조던은 이듬해 신인왕을 차지하며 프로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아갔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 워낙 그가 유명해서 농구의 23번 하면 99.9% 조던.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넘버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13년 동안 조던은 단 한번도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치지 않았고 통산 6회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의 순간마다 챔피언전 최우수선수(MVP)는 그의 차지였다. 2001년 워싱턴 위저즈 유니폼을 입은 조던은 올 시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미국에서는 NFL에 대적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조던의 선수시기에는 시청률에서 대등하게 기록하는 등 실질적으로 NBA라는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산 게임당 득점이 30.1점으로 올 타임 1위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였으며,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 역시 굉장했다.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 돈을 받지 않고 뛰어 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결과적으로 농구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통산 평균 득점 1(30.12득점), 득점왕 10, 정규리그 최우수선수 5회 등 최고의 자리는 언제나 그의 것이었다.

 

 

조던은 두 차례 은퇴와 복귀를 반복했다. 1993년 정신적 지주이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사망한 충격으로 코트를 떠나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하다 1995년 복귀했다. 1994 2 15,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프링캠프 훈련에 참가함으로서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조던의 마이너리그 데뷔전에 1만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마이너리그 치고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경기성적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저조한 성적이 계속되자 "에어 조던이 아니라, 에러 조던", "짐 싸, 마이클!" 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농구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조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썼다. 노력의 결과인지 4월에는 1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7월엔 생에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메이저 리그 파업사태가 벌어지고 이 파업은 232일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90년만에 월드시리즈조차 치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로 치닫고 말았다. 결국 1995 35일 조던은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 26일만에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94-95시즌에 이전과는 다른 45번을 달고 복귀했지만 그간의 연습 부족과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아 결국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올랜도에게 패배한다. 복귀 후 치른 경기에서 패배를 당한 이후 와신상담한 조던은 신인시절보다 더 빡센 트레이닝을 거쳤다. 95-96 시즌, 팀은 FA로 이적한 호레이스 그랜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시 감독과의 불화로 팀에서 겉돌고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데니스 로드먼을 영입하고, 이 해 이들은 72 10패라는 NBA 역대 최고 승수를 기록하였다. 조던이 득점왕, 로드먼이 리바운드왕에 토니 쿠코치가 식스맨상을 수상했고,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조던, 피펜, 로드먼 세 명이나 올라가기도 했다.

 

1999 1월에는정신적으로 지쳤다며 두 번째 은퇴를 선언했다. 첫 번째 은퇴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한 것과는 다르게, 두 번째 은퇴에 관해서는 팬이나 농구관계자, 스폰서 모두가 정점에서 멋지게 퇴장하는 그를 위해 박수를 보내주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심지어 MBC에서 그의 은퇴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 방영할 정도였다면 그 분위기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화려한 농구인생을 정점에서 마무리한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의 주식을 매입해 주주로서 있다가, 구단주의 권유로 우리 나이로 마흔인 2001 9농구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가 복귀한 사실에 대해 팬들은 당시 떨어져만 가던 NBA의 인기를 회복시키고자 데이비드 스턴이 복귀를 종용했다는 후문이 있었고, 후에 조던 또한 자의로 복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로 이를 어느정도 긍정했다. 조던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 현저한 능력 저하를 보임에 따라 팬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그의 운동능력과 센스는 그가 누구였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2003년 그는 3번째 은퇴를 하게된다.

 

그의 인기와 능력을 알 수 있는 몇몇 기록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역시절엔 무려 9번이나 올스타 투표 전체 1위에 올랐다.

 

2)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인 Harris Poll의 자료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조던은 93년부터 2005년까지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1위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설문이 시작된 게 93년이다! , 이 기록이 더 길수도 있었단 말. 게다가 이 기간중 상당부분 은퇴한 상태였다.

 

3) 선수들이 자기 이름을 딴 신발을 출시하는 트렌드를 본격적으로 만든게 조던과 에어 조던 브랜드이다. 에어조던이 워낙 인기가 많자 나이키는 조던 관련해 신발, 의류 등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조던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연봉을 1억달러도 못 받았는데 98년 은퇴 당시 그의 재산은 5억달러에 달했다.

 

4)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2015 43(한국시간) 인터넷 홈페이지인 ‘ESPN.COM’ 창간 20주년을 맞아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간 전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활약을펼친 스포츠 선수 2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농구 황제마이클 조던이 최근 20년간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스포츠 선수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