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3일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교수형

산풀내음 2017. 3. 5. 22:27

18954 23,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교수형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이 1895 4 23일 서울에서 처형됐다. 41세였다. 녹두장군은 그렇게 갔다. 봉기가 시작된지 고작 1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984~85,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전봉준은 그 전해 공주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대격전에서 패한 후 순창으로 피신, 동지들과 재기를 모색하던 중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

 

먼저 동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학은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한 것이다. 종래의 풍류 사상과 ()·()·()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제를 부정하는 현실적이고 민중적인 교리로 빠르게 삼남지방에 퍼졌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4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 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시천교(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구제활동을 철저화하려는 정치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면서 역사적으로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4 2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하였다.

 

또한 부민(富民)을 체포하여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만도 2만여 냥()에 달하였으며,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 냥이나 되었고, 대동미를 정미(精米)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상납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특히 만석보는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동진강(東津江)에 건설한 수리시설로서 이를 이용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받는 수세(水稅)가 너무 과중하여 자주 그 경감을 청원한 바 있었다.

 

그런데 조병갑이 새로 군수로 부임해 오자 여기에 덧붙여 강의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서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하였다. 1893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약하였다.

 

그와 동시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도소(都所)를 정하고 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② 군기창과 화약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아유(阿諛:아첨)하여 인민을 침어(侵漁)한 탐리(貪吏)를 격징(擊懲)할 것, ④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直向)할 것 등의 4개 항을 결의하였다.

 

당시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

 

이듬해인 1894 2 10일 전봉준은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하여 전주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고, 김문현은 이를 다시 정부에 알리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 되자 그를 체포하여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 1894 4월 김기범,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민간에 포고하여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무장·백산에서의 봉기는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지양하고 이제는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며 개혁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왕은 5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람은 아무 벌도 주지 않을 것을 약속하여 난도(亂徒)로 하여금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타이르는 선무책을 썼다.

 

동학농민군은 1894 5 31일 전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이 당시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5월 5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였는데,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 달리 바로 다음날인 5월 6에 일본군이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청 군대가 조선에 출병 시 왜군도 동시에 출병한다는 톈진 조약에 근거하여 전격적으로 인천에 상륙한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정부는 교정청,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 이때 실시된 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일본군의 역습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한양을 점거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함으로이는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고 조선을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남산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이라고 읽는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

 

이 때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중심이라 할만한 북접은 전봉준을 부정하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게 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합류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0만에 이르는 대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정부군과 일본 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무기 숙련도가 높은 일본군이 돕는 정부군에게는 화력에서 열세였고, 결국 11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이 대패하고 이 후 각개격파를 당하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이후 중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잡힌 후 바로 효수되었으며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집결하려 했으나 1894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채경선, 서장옥 등도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