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3일

한성임시정부 수립

산풀내음 2017. 3. 5. 22:35

19194 23,

한성임시정부 수립

 

1919년 우리나라는 31운동과 만세시위로 민족의 단결력과 독립정신이 어느 해보다 들끓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독립의지와 달리, 하나만 수립되어야 할 임시정부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하에 연락 불충분으로 상해, 노령, 서울 등에 수립되는 등 난립했다.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7개의 정부 중에 조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과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 그리고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는 누가 추진한 것인지, 어떻게 수립된 것인지를 알 수 없이 단지 전단으로 발표된 것에 불과하였지만, 서울의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 즉 통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수립한 통칭 노령정부(露領政府)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기 그곳 독립운동자가 추진하여 수립한 것으로 수립과정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천도교 측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한 것이 있어서 그를 대한민간정부(大韓民間政府)라고 부른다.

 

이중 가장 빠른 것이 1919 3 17일에 결성된 대한국민의회였다.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군무총장에 이동휘 등을 선임했다. 1919년경 러시아령에는 50만명에 달하는 한인이 있었고 역시 교포가 많이 사는 만주와 인접했다는 장점이 있었다.

 

3·1운동 뒤 국내의 독립지사들이 주동이 되어 장차 독립에 대비하여 수립한 한성임시정부는 다른 곳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 비하여 국민대회 등 정당한 절차를 거치고 탄탄한 조직을 가져, 훗날 상해임시정부와 통합되면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19 3·1운동직후 홍진(본명 홍면희),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등은 각처의 시위운동이 통일돼 있지 않으므로 국민대회를 조직, 개최하고 각계의 독립운동 세력을 망라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즉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3월 중순부터 동지규합에 들어가 4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만국공원 회합에서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일반에 선포할 것을 결정하고 한남수와 홍명희에게 전체 실무를 맡겼다.

 

만국공원 회합 며칠 뒤 한남수·김사국·김규 등은 경성부 내자동 64번지 한성오의 집에 모여 「국민대회취지서」제작을 비롯한 제반 실무를 협의하였다. 이후 초기 국민대회를 기획했던 한남수, 홍면희, 이규갑이 상해독립임시사무소와 연락을 위해 4 8일 한국을 떠나자, 국민대회는 안성덕과 김사국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미리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와 2수천 장을 찍었다.

 

한성임시정부는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부 총장 이동녕, 재무부 총장 이시영, 법무부 총장 신규식, 군무부 총장 노백린 등을 각료로 선임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결성한 정부였지만 정부 각료는 모두 해외 망명 중인 인사로 선임되었다.

 

1919 4 23일 전국 13도를 대표하는 25명이 서울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학생과 시민대표들이 정오를 기해 보신각 앞,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 등 네 곳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의 정통성을 이은 한성임시정부는 이날 국민대회에서 약법 제1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2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 등을 명시함으로써 한성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임을 명백히 밝혔다. 당시 세계적 통신사인 UP 통신이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국외에 보도하자 그 약법이 채택한 민주적 정치제도가 미국 등 서구 제국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같은 해 9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한성임시정부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한성임시정부 각료 전원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직을 맡았다.

 

한성임시정부의 주역들, 좌로부터 홍진, 이규갑 그리고 김사국

 

홍진(洪震) (본명 홍면희, 洪冕憙)

본 정부가 인민의 중탁(重託)을 받고 광복의 큰 짐을 진지라. 피가 아니면 왜적을 구축(驅逐)할 수 없으며 무력이 아니면 해방을 꾀할 수 없는지라. 여러 장령(將領)들은 이로써 명심하야 나라에 진충(盡忠)하여 애오라지 공무사(公無邪)하여라. 용맹스럽게 나가거라. 그리하야 왜놈을 무찌르고 우리의 옛 나라를 광복하여라.” (1940 10 5일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광복군에게 한 訓辭 中)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규갑의 어머니는 “사내들이 국난에 집에만 있어야 되겠느냐”고 매일같이 호통을 치시며, 빨리 나가서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어머니 말씀에 그의 형인 이규풍(李奎豊)은 서울로 갔고, 이규갑에게도 밤낮없이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심지어 아들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하며 회초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