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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횡혈묘 공주서 무더기 발굴, 백제-일본 교류 입증

산풀내음 2017. 3. 5. 22:38

20044 23,

일본 횡혈묘 공주서 무더기 발굴, 백제-일본 교류 입증

 

지금까지 일본 특유의 묘제로 생각되던 횡혈묘(橫穴墓)가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확인됐다. 충남 공주군 우성면 단지리 일대에서 횡혈묘15기가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됐다고 충청문화재연구원이 2004 423일 밝혔다.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지리 토성이 자리 잡고 있는 성재산 자락의 가파른 경사면인 이 지역에는 화강암이 넓게 분포돼 있다. 화강암 지질은 다른 바위에 비해 파기 쉽고 흙과는 달리 잘 무너지지 않아 횡혈묘를 쓰기에 적당한 곳이다. 횡혈묘란 풍화된 화강암 암반층을 밑으로 뚫고 내려간 뒤 다시 옆으로 2m가량 뚫어 현실(玄室·무덤방)을 만들고 입구를 판석(板石)으로 막는 무덤 형태다.

 

이 횡혈묘는 그동안 문헌에 드러나지 않던 백제와 일본 사이의 교류를 입증하는 유적으로, 앞으로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횡혈묘는 대부분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으며, 인골과 뚜껑 있는 접시(蓋杯), 작은 항아리(小壺) 등 부장 유물도 출토됐다. 특히 뚜껑 있는 접시 형태는 나선형으로 회전물손질한 기법 등으로 볼 때 일본 고분시대의 토기인 스에키(須惠器) 5세기 후반의 것과 비슷해 주목된다. 후쿠오카(福岡)오이타(大分) 등 북부 규슈(九州) 일대에 집중 분포된 일본 횡혈묘의 조성 시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이다.

 

이번 발굴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연 일본 횡혈묘와의 연관성이다. 일본의 횡혈묘에는 현실의 입구가 넓고 깊이가 얕아 시신을 옆으로 넣는 횡장(橫長)식 무덤과 입구가 좁고 깊어 시신을 깊숙이 넣는 종장(縱長)식 무덤이 있다. 단지리 고분군 중 내부조사가 이뤄진 14기 중에는 종장식이 9, 횡장식이 5기였다. 일본 횡혈묘가 초기에는 횡장식과 종장식이 섞여 있다가 후대로 가면서 종장식만 나타난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번에 발굴된 고분군은 일본 횡혈묘의 초기형태를 닮은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하나의 무덤 안에 여러 구의 시신을 여러 차례에 걸쳐 추가로 매장했다는 점도 일본의 횡혈묘 양식과 흡사하다. 15기의 횡혈묘 중 4기에서 추가장()이 확인됐다. 특히 가장 규모가 큰 3호 횡혈묘에서는 4, 5구의 인골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번 발굴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이들 횡혈묘의 조성연대가 일본 횡혈묘 초기와 비슷하거나 더 빠르다는 점에서 백제 횡혈묘가 일본 횡혈묘의 기원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둘째, 이들 무덤이 백제로 들어온 일본인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발굴팀은 이 무덤이 백제 동성왕(재위기간 479500) 때부터 무령왕(501523) 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무령왕(사마왕)이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들 무덤이 무령왕을 호위한 일본인 집단의 묘지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박순발 충청문화재연구원장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송산리 고분군이 있어 어떻게 해석되든 이들 횡혈묘는 한일 고대문화의 비밀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횡혈묘가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아니다. 이미 2000년 공주시 탄천면 안영리에서 3, 장선리에서 1기가 발굴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실(玄室·무덤방)의 천장 부분이 함몰돼 있거나 부장품이 출토되지 않아서 연대추정이 불가능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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