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 도드 피랍

산풀내음 2017. 3. 21. 20:56

1952 5 7,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 도드 피랍

 

1951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것은 포로 때문이었다. 유엔군측이 발표한 북한군 포로는 132400여명(중공군 포로 2700명 포함)이었고 북한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는 1개월 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65000여명에 훨씬 못 미치는 11500여명(유엔군 4400여명 포함)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포로송환이었다. 유엔군측이 인도주의적인 점을 강조한 자유송환 즉 원하는 포로만 북한으로 보낸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측은 1949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대로 자동송환 즉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7만 여명뿐 이라고 유엔군측이 북한에 통보하면서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도 친공ㆍ반공포로로 갈려 유혈사태를 빚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측은 공작원들을 포로로 잠입시켜 수용소 내 친공포로들을 배후 조종하며 반공포로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테러를 일삼았다.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분뇨와 오물을 수용소 밖 쓰레기장으로 운반하고 있다. (1952. 3. 20)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들이 정치구호나 그들의 요구조건을 적은 플래카드들 수용소 내에 내걸어두고 있다. (1952. 3. 20)

철조망이 2, 3중인 거제포로수용소(1953. 4. 13.).

 

이로 인해 크고 작은 폭동이 빈발하던 1952 57,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ㆍ감금되는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치밀한 친공포로들의 계략에 의해 수용소 안으로 끌려간 것이다.

 

1952 5 7, 도드(Dodd) 준장은 제76구역 포로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포로수용소장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드 준장 보좌관은 포로들의 과격한 행동을 우려한 나머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도록 포로수용소장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도드 준장은 보좌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약속시간에 제76구역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대표들과 면담했다. 그런데 면담 도중 갑자기 포로들이 그를 에워쌓다. 곧 포로들은 순식간에 도드 준장을 납치하여 포로수용소 안으로 끌고 갔다.

 

당시 수용소 소장 도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사태를 긴급 보고받고, 즉각 콜슨 준장을 새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친공 포로들은 도드 준장 감금에 성공하자 콜슨 신임 포로수용소장에게 도드 석방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 요구조건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유엔군 기간병들의 포로에 대한 야만적 행위 중지, 포로 자유송환 중지, 포로 강제분리 심사 금지, 포로대표단 인정 등이었다.

 

콜슨 소장이 그들에게 포로 자유송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자 친공 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풀어주었다. 도드가 감금된 지 3일만이었다.

 

도드 준장이 석방되자 유엔군사령부는 그의 실책을 추궁했다. 그와 함께 사태 수습을 맡았던 콜슨 준장도 너무 큰 양보를 하였기에 포로수용소장으로 신중치 못한 처사라 하여 그 책임을 물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즉각 콜슨 포로수용소장도 해임하고, 그의 후임에 보트너 준장을 새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런 뒤 도드 납치진상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곧 도드와 콜슨 두 준장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불명예 조치를 내렸다.

 

도드 준장 석방요구 조건으로 의외의 수확을 얻은 포로들은 더욱 기세 등등해졌다. 그들은 수용소 내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 사진을 내거는가 하면, 포로수용소 곳곳에 미군을 모욕하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신임 보트너 준장은 이에 분개하여 공수특전단을 포로수용소에 투입하는 강경책을 폈다. 공수특전단은 탱크를 앞세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포로들이 게양한 인공기를 모두 내렸다. 그런 뒤 친공 포로를 500명 단위로 강제로 분산 수용하여 그들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들이 거부한 포로송환 심사도 받게 했다. 보트너 신임 포로수용소장의 강경책 이후 포로수용소 내에서 인공기나 중국기가 게양되는 일은 차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