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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 사건 110년 만에 사죄(謝罪)의 뜻 전하기 위해 방한

산풀내음 2017. 3. 2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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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 사건 110년 만에 사죄(謝罪)의 뜻 전하기 위해 방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110년 만에 처음으로 시해범들의 후손이 한국 땅을 찾아와 사죄를 했다.

 

 

흔히을미사변으로 알려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황후의 친러 정책을 막으려던 일본 세력이 1895 10 8일 새벽 경복궁 내 명성황후 처소인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에 난입, 황후를 죽이고 불태운 사건이다.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의 지휘 아래 당시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가 낭인들을 이끌었다. 미우라와 구니토모 등 명성황후 시해범 56명은 이듬해인 1896년 히로시마 법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으며, 구니토모는 1909년 병사했다.

 

황후를 시해했던 범인 48명 가운데 구니도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손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 84)와 이에이리 가가치(家入嘉吉)의 손자며느리 이에이리 게이코(家入惠子), 그리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10명 등 모두 12명이 9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대화 모임을 갖고 "우리는 진정한 사죄를 하러 왔다. 이제 시작이다"라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사죄나 유감 등 어떤 반응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록한 일본 역사교과서는 단 한 종뿐이나 이마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에 밀려 삭제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앞으로 교과서들이 이 사건을 기술하도록 시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가와노는 "오늘 아침 출국에 앞서 가족묘를 찾아 '할아버지가 지으신 죄를 대신 씻으러 한국에 갑니다'고 말씀 올렸다"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다도 전문가인 이에이리 게이코는 "제 방식대로 명성황후께 사죄하기 위해 묘소에서 극진한 정성으로 차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최서면(崔書勉. 77) 명지대 석좌교수(전 도쿄 한국문화원장) "일본은 이제까지 말로만 사과했을 뿐 진정한 행동을 보이지 않아 사과의 횟수만 늘어났다"면서 "당신들처럼 진심으로 사죄하는 일본인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며 악수를 청하자 가와노 씨는 눈물을 흘리며 최 교수의 손을 잡았다.

 

최 교수는 "명성황후의 국장이 여러 차례 연기된 것은 시해범의 목을 베어 황후에게 바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고종의 의지 때문이었다"며 많은 자객이 일본에 밀파됐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 우범선(우장춘 박사의 부친)을 암살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양심적인 전직교사 20여 명이 모여 결성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 76)는 지금까지 자객들의 후손 14명을 확인하는 한편,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을 두 집안에서 발견하는 등 각종 기록과 자료를 속속 발굴 중이라고 밝혔다. 또 후쿠오카(福岡)의 한 사찰에서는 한 시해범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만들었다는 명성황후의 석조상도 발견됐다고 가이 씨는 전했다. 그는 이 모임이 구마모토(熊本)에서 결성된 데 대해 "시해범 48명 가운데 20여명이 한성신보 기자와 직원 등 구마모토 출신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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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노씨와 이에이리씨 외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10일 명성황후와 고종이 합장된 남양주시 홍릉과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참배하고 11일 경복궁을 찾은 후 12일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