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4일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사망

산풀내음 2017. 4. 15. 17:53

1954 5 24,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사망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이다. 훌륭한 화가의 캔버스와 같이 카파는 대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

존 스타인 벡, John Ernst Steinbeck, Jr.

 

 

1954 5 24,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미국, 1913 ∼ 1954) 가 베트남전을 취재하던 중 지뢰를 밟고 폭사했다.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점 중 한 가지는 그가 평생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 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흘러 든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Gerda Taro, 1910. 8. 1 – 1937. 7. 26) 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그의 생활은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삶을 살았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영원한 연인 겔다 타로

 

로버트 카파란 이름이 마치 종군기자 혹은 전쟁 사진 전문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진의 주된 소재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었다.

 

카파를 유명하게 만든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이 해에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스페인 내란에서 자신의 아내 겔다를 잃고 만다. 그와 겔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겔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겔다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겔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여러 여성들, 특히 잉그리드 버그만으로부터도 청혼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평생 전쟁터를 떠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버트 카파를 사랑한 전설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전쟁이 있는 곳에는 카파가 있었다. 중일전쟁, 공습하의 런던, 북아프리카 전선, 시칠리아 공략, 노르망디 상륙작전, 2차대전 때의 파리해방 등이 주무대였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은 종군기자 카파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카파는 이때 108장의 역사적인 사진을 촬영했으나 흥분한 암실조수가 현상된 필름을 말리다 과열로 망쳐버리는 바람에 8장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더구나 피사체까지 흔들려 정상적인 경우라면 폐기됐어야 했지만 라이프지는 상륙작전의 긴박감이 잘 드러난다며 게재를 결정했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게 라이프지가 붙인 사진설명이었다. 이후 이 사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명사가 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The landing at Normandy, 1944. - 이 사진이 잡지에 게재되면서 사진에 대한 캡션으로 사용된 말이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을 누빈 그의 기자정신은 그의 이름을 딴카파이즘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종군기자의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는 게 종군기자로서의 그의 자세였다.

 

로버트 카파는 전쟁사진을 단순히 보도하는 입장에서만 촬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그는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대신에 인간의 내면 세계를 전쟁이란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급박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평상시 자신의 가식된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로버트 카파는 촬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관찰자적, 보도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기록성을 위한 사진이 아닌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가자로써 급박한 상황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The Story of war photographer Robert Ca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