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4일

김재규 외 4명, 교수형 집행

산풀내음 2017. 4. 15. 18:03

1980 5 24,

김재규 외 4, 교수형 집행

 

1979 10 26일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시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980 5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박정희와 육사2기 동기였으나 연장자인 박정희를 `상급자`로 모셨다. 건설부장관을 거쳐 1976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돼 대통령 지근에서 보좌하다 직속부하인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좌로부터 차지철, 박정희, 김재규

 

암살동기를 둘러싸고 민주화를 위한 거사로 그를 찬양하는 사람도 있으나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결국 김재규는 내란목적의 살인혐의로 기소돼 군사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이날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김재규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2 4일 첫 공판 후 18일 결심 공판까지 14일 동안 8명의 피고인에 9차례 공판이 진행됐다. 거기다 결심 후 이틀 만인 12 20일 사형이 선고됐다.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역사적인 재판이 역사상 유례없는 졸속이었다”며 “항소이유서 작성을 위해 원심기록과 수사기록을 복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연필로 베끼는 것만 허용 받았다. 기록을 대충 읽어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96년 ‘신동아’ 10월호)고 했다. 김재규의 사형 집행은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진(5 17) 직후인 80 5 24일 이뤄졌다. 당시 그의 구명운동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옹 등 재야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육사 2기 동기생이긴 했지만 김재규는 소위 시절 면관까지 당한 일이 있어 진급이 늦었다. 박 대통령은 아홉 살 어린 그를 고향(경북 선산) 후배로 각별하게 챙겼다. 5·16이 성공하자 “이 나라 경제를 살리려면 농촌부터 살려야 한다”며 호남비료공장 건설 임무를 주면서 그를 사장에 임명했다. 이후 군의 요직인 6사단장(수도권 외곽 경비를 맡던 유일한 예비사단)과 보안사령관에 임명했고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발탁했다.

 


1975 10 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하는 박정희 대통령. 뒤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건설부장관

 

한편 김재규는 70년대 말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상황 분석만 했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는 말도 있다. 훗날 재판정에서 김계원은 그의 성격을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저돌적이었다. 추진력과 박력이 있었지만 뒷정리를 제대로 못해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의협심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이틀 전인 522일 모친과 부인 등 가족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면회를 했다. 김재규는 이날 부인 김영희씨 등에게 불경(금강경) 내용을 인용,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음을 비운다는 뜻)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고 한다.

 

부하들 걱정과 함께 그 가족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가족들은 이날 면회시간이 끝나고 그가 뒤돌아서 들어간 교도소 문을 향해 10여분간 소리 없는 합장을 올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관계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김재규는 교도소 수감 이후 첫 면회를 온 모친이국부(國父)를 죽인 자가 살기를 원하느냐? 마음을 닦아라고 말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김재규는 이어 교도소측이 제공한 모포를 깔고 모친을 앉힌 뒤 3차례 손등을 땅쪽으로 하여 큰 절을 올렸다.

 

불교도였던 모친은 품속에 준비해온 염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때 교도소측은 이 염주가 혹시 있을지 모를 자살기도에 이용될 것을 우려,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염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마지막 날인 524일 새벽 4시쯤. 교도소측은 달걀과 사과 커피를 특별메뉴로 제공했으나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쇠 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과 포승 모양을 지어 보이더니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교도소측이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안개 피우지 마라. 사나이가 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는 5분간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식사를 하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것은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철통 같은 호송속에 서울구치소로 호송된 김재규는 오전 6시쯤 교도소 당국이 법정에 나가는 수감자들을 보내고 자신을 반대편 대기실로 격리시키자 이미 허공에 혼을 날려보낸 듯 멍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형 집행 직전 비굴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는 일각의 소문에 대해 당시 관계자들은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증언했다. 한 관계자는김재규는 전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형집 행 직전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훗날 전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날 이미 자신의 유언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사형집행 절차는 채 30분이 못 돼 끝났다. 부하 4명도 1시간 간격으로 잇따라 처형됐다.

 

그는 죽기 하루 전날인 1980 5 23일에 자신이 수감돼 있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육성유언을 남겼다. 그 자세한 내용은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10/nd98100020.html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基心)'이라..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아무런 조건없이
마음을 내어서 보살행을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주고
받으려 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은 척박한
마음입니다.

 

거울이 앞에 놓인 물건을 비출 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하는 이유는
머무는 모든 생각이 집착으로 헛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