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6일

서영춘, 코미디언 최초 리사이틀 공연

산풀내음 2017. 4. 18. 20:30

1967 5 26,

서영춘, 코미디언 최초 리사이틀 공연

 

전설을 넘어서서 일상처럼 친숙해지는 것들이 있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 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승강을 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소.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같은 노래가 그렇다.

 

이 노래가 한국인들의 귀에 울리기 시작한 건 1936년이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불리던 이 노래를 번안하여 내놓은 건 우리가 익히 아는 스타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강홍식이었다(이 강홍식의 딸이 최민수의 어머니이자 최무룡의 부인 강효실).


원래 월북자들의 노래는 대개 금지곡이 되고 분단의 철창 아래 파묻히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이 ‘서울 구경’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남한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니 그 주역이 바로 살살이 서영춘이었다. 이것은 90년대 후반 <남자셋 여자셋>의 이의정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영춘은 어려서부터 남의 흉내도 잘 냈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한양공고를 졸업하고 1946년 황금좌(국도극장의 전신)에 극장 간판을 그리는 화공으로 취직했으나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 악극단 배우들이 부러워 신세기악극단에 입단했다. 서영춘은 악극단에서 단골 바보역으로 인기를 끌던 한 희극배우가 급환으로 사망하자 그의 대역으로 나선 것을 계기로 코미디언이 되었다.

 

서영춘에게 출세의 문을 열어준 것은 100㎏이 넘는 거구의 백금녀와 콤비를 이루면서였다. 이들은 <거꾸로 부부>라는 코너에서 능청스런 연기를 펼쳐 큰 사랑을 받았다. 제목 그대로 남자인 서영춘은 요염한 여자로, 여자인 백금녀는 우악스러운 남자로 분한 코너로 뛰어난 구성력과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0년대 초 서영춘, 백금녀 콤비는 극장쇼의 최고 스타로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서영춘은 1964년 라디오 서울(TBC 전신)의 개국과 함께 선보인살살이 서영춘’, ‘여보 마누라’, ‘꽁생원 상경기등의 방송 코미디를 통해방송 코미디의 개척자가 되었다.

 

 

콤비를 이루던 뚱보 백금녀에게 덥석 안기기도 했던 그는 슬랩 스틱 코미디, 즉 때리고 넘어지고 등등의 연기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그건 항상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다고 한다. 녹화장에 가장 먼저 나왔고 넘어지는 각도와 관객의 시선을 연구했고 그가 넘어지면 유달리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토록 유쾌하게 관객을 웃겼지만 일상에서 그는 무척이나 엄했다고 한다. 손아랫 동생이 그 앞에서 무릎을 펴고 앉지를 못했을 정도였고 후배들에게도 즐겨 불호령을 내리는 선배였다. 그리고 정홍택 기자의 한국일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코너에서 서영춘은 독서량에서 기자를 압도하는 진귀한 코미디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1965 TBC TV 개국과 함께 TV에서도 맹활약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살살이가 되었다. 당시 TBC TV유머극장’, ‘좋았군 좋았어는 코미디와 유머를 대중에게 정착시킨 히트 프로그램이었다. 1960여자가 더 좋아에서 여장남자로 변장해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은 이래 60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해 은막에서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최초기록이 많다. 여장남자도 최초이고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cup) 없으면 못 마십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지기지기잔짠 쿵잔짠은 한국 최초의 랩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으로 시작하는 노래서울 구경은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1967 5 26일부터 28일까지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코미디언 최초의 리사이틀 격인신작 발표회를 열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도 소주를 마셔 긴장을 풀었을 정도로 술을 사랑했으나 결국 1986 58세 나이에 간암으로 작고했다. 투병 생활 도중 한 후배가 면회를 왔다. 서영춘이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하자 후배는 요즘 우리가 통상 하는 말버릇대로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병석의 서영춘은 통렬하게 일갈한다. “이놈아, 나는 살지 못해 죽는다 이놈아.” 흡사 선문답같은, 그러나 선문답처럼 어렵지는 않은, 우리들의 삶을 관통하고 헤집는 가운데 정수리를 콕 짚고 넘어가는 문답이 아닌가?

 

어느 학교엔가 서영춘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제막식에서 동료 송해는 서영춘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 영춘이! 그대가 외쳤던 말,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타였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예언이 되는 교훈이었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 백반, 없던 시절에 아무 것이나 잘 먹자는 소리였으이, 뿐인가? ‘살살이…’, ‘요건 몰랐을거다’, ‘배워서 남주나’ 이 말은 면학을 장려한 말이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없이는 못마십니다’ 이 말 또한 가진 것을 잘 활용하라는 일침 아니었나?” 아마도 서영춘씨는 이 말을 들으며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알았어? 갈갈갈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