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6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국가원수 처음으로 전범협의 기소

산풀내음 2017. 4. 18. 20:41

1999 5 26,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국가원수 처음으로 전범협의 기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Slobodan Milošević, 1941 8월 20 ~ 2006 3월 11) 유고연방 대통령이 `전범` 리스트에 올랐다. 구 유고 국제전범재판소(ICTY,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는 밀로셰비치를 코소보에서의 만행과 관련,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했다고 CNN방송이 1999 5 27일 보도했다. 현직 국가원수가 국제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밀로셰비치가 처음이다.

 

'발칸의 도살자(The Butcher of the Balkans)'로 불리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전역에서 전쟁과 학살을 자행, 20만 명을 숨지게 하고 300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으며 유고 경제를 파탄시켰다.

 

1941 8 20일 세르비아 동부 포자레바치에서 그리스 정교 성직자와 열렬한 공산주의자 교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1964년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1987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민족주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 해 스탐볼리치의 뒤를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뒤 대 세르비아주의를 제창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킨 그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연방 대통령직에 올라서면서도 철권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당시에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그는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를 만든 다음 수용소에 사람들을 끌어다가 놓고서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을 개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거나, 조금 조금씩 고문을 하다가 죽이던지 손톱을 뽑거나 눈알을 빼내서 죽이거나, 여성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간하는가 하면, 강제로 썩은 물질이나 심지어 인육을 먹게 하는 미친 짓거리를 자행했고, 사람들을 총살시키거나 산채로 사람들을 생매장시키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는데 구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였다 이 학살로 무려 8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땅에 묻혀 학살되었다. 학살뿐만 아니라 독재자답게 부정부패에도 열심이었는데, 횡령한 돈이 무려 10억 달러나 되었다.

 


코소보 대학살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 당시 코소보(알마니아계)의 자치가 인정되었으나, 미로셰비치는 이를 불허하고 언어마저 빼앗음. 나아가 코소보의 독립을 막기 위해 1998 2월부터 인종청소를 감행함

 

그러나 그는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서방이 경제제재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고, 코소보 사태 때에도 수 차례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999나토의 유고 공습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고 국민적 저항이 거세진 가운데 결국 신 유고연방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한 후 선거결과를 조작해 2차 결선투표를 강행하려 했으나 이에 반발하여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세르비아 국영 RTS방송국을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나고 무려 3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퇴진을 외졌는데 2000 10 5일에 결과를 인정하고 13년간 유지해 온 권좌에서 물러났다.

 

1993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인종청소'전범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2000년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는 2001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돼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아 왔으나, 밀로셰비치는 이 재판을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고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모든 것들이 자랑스럽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의 유엔 안전 지대에서 8,400여 명의 이슬람 교도를 대량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002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결국 2006 3 11일 헤이그 감옥에서 64세의 나이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일까??? 이유 없이 학살당한 이들에 대해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 아닌가???

 



유고슬라비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구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칸전쟁, 10년 전쟁 등 다양하게 불려짐)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에서 1991부터 1999까지 수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을 일컫는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6개 구성 공화국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이탈을 선언한 후, 이를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점차 민족 분규의 성격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프라뇨 투지만 두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대결 양상을 띠었다.

 

보스니아에서는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인들이 이 틈새에 끼어 3파전이 되었다. 이는 민족청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코소보마케도니아에서는 슬라브계 정부와 자치 내지 독립을 추구한 알바니아계 소수 주민들의 인종·정치적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패배로 끝났으며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서는 국제 협상으로 끝났다.

 

1) 유고슬라비아 분리 독립 전쟁

슬로베니아 전쟁(1991) 10일간의 짧은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1991-1995)

보스니아 전쟁(1992-1995)

크로아티아-보스니아 (1992-1994)

 

2) 알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의 전쟁

코소보 전쟁 (1999)

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 국경 충돌 (1999년) (AlbaniaYugoslav border incident (1999))

프레셰보 계곡 전쟁 (1999-2001) (Insurgency in the Preševo Valley)

마케도니아 전쟁 (2001) (Insurgency in the Republic of Macedonia)

 

3) NATO의 반 세르비아 전쟁:

1995 나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격 (1995-96)

1999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 (1999)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나라로 분리됐다.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릅스카 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브르치코 행정구로 갈라짐)

세르비아 (코소보가 독립을 선포)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