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8일

미국과 이란 27년 만에 공식회담

산풀내음 2017. 4. 22. 08:29

20075 28,

미국과 이란 27년 만에 공식회담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유발된 미국과 이란의 국교 단절 이후 공식 접촉이 없었던 양국이 27년 만인 2007 5 28일 처음으로 회담 테이블에서 마주했다. 주요 의제는 이라크 사태. 그러나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양국 회담은 1차 탐색전으로 끝났다. 하지만, ()무드 아()마디네자드(1956 - ) 이란 대통령은 회담에 앞서, “미국이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의 6번째 대통령(2005-2013)으로 집권 이후 줄곧 미국 부시 행정부에 대립각을 세웠으며, 또한 그는 공공연한 반 이스라엘주의자로 특히 2005 10월에는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라고 했다.

 

이라크에 주재하는 미국의 라이언 크로커(Ryan Crocker) 대사와 이란의 하산 카제미(Hassan Kazemi) 대사는 528일 오전 바그다드의 미군 보호지대인그린존에서 만나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크로커 대사는이라크 안정화 문제를 의제로 실무적으로 진행됐으며, ()이라크 정책에 있어서 서로 폭넓은 합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회담은 상호 신경전이 계속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크로커 대사는이란측에 대해지금까지 해오던 행동을 바꿔 (이라크 내) 시아파 무장저항 단체에 대한 자금·훈련·군수 지원을 중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요구했다고 했지만, 이란측은 이 같은 주장 자체를 부인했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또 카제미 이란 대사는 회담 중에 자국과 미국, 이라크로 구성되는 ‘3자 안보 체제구축과 미·이란 간 제2차 회담 제의 의사를 밝혔지만, 미 대사는추가 회담 여부는 본국에서 별도의 검토를 거친 뒤에야 결정될 문제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회담에 앞서 마누셰르 모타키(Mottaki) 이란 외무장관도앞으로 미국과의 추가적인 만남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전 등에 대해실패한정책을 자인하고 난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U.S. Ambassador to Iraq Ryan Crocker, left, Iranian ambassador Hassan Kazemi

 

 

1948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안에 정책조정실(OPC)이라는 비밀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의 임무는 ‘적대적 국가의 체제 전복, 적대적 정권에 맞선 저항그룹과 반공 세력 지원’, 다시 말해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이 기구를 이끈 프랭크 와이즈너(Frank Wisner)가 저지른 공작 중 대표적인 것이 과테말라에서 농지개혁을 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과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 1882 ~ 1967) 총리를 축출한 일이었다.

 

1953년 미-영이 배후 조종한 쿠데타로 실각한 모사데그 총리

더러운 책략가 Frank Wisner.

 

저술가 겸 행정가·법률가로 명망을 날렸던 모사데그는 1951년 집권 뒤 영국계 석유회사인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는 브리튼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다. 와이즈너는 영국의 군 대외정보국(MI6)과 함께 공작을 벌여 모사데그 축출에 나섰고, 결국 모사데그는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의 팔레비 쿠데타로 쫓겨났다. 2차 세계대전 뒤 중동 각국 국내정치에 깊이 관여해 친미 독재정권들을 양산했던 미국 대외공작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오늘날까지 이란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넘게 미국과 이란은 맹방에서 적국으로, 애증의 관계를 넘나들었다. 모사데그를 몰아낸 쿠데타에 일조했던 레자 샤 국왕의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미국을 등에 업고 전제정치를 자행했다. 백색테러와 억압통치가 이란인들을 짓눌렀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실한 동맹 노릇을 했던 것이었다.

 

미국과 이란의 끈적끈적한 관계는 1979년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 9월 22 ~ 1989 6월 3)의 이슬람혁명으로 격변을 맞게 된다. 프랑스에 망명해 있다가 반() 왕조 민중혁명이 일어난 후 1979 2 1일에 테헤란에 돌아온 호메이니는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시기에 양측 어느 쪽과도 협력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신정(神政) 국가’를 세웠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직자 집단에 의해 선택된 파키(이슬람 법학자)여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파키는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하며, 같은 성직자 집단에 의해서만 권력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파키를 선출하지 못하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이란 국민들은 매 8년마다 이란 파키 회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성직자들을 선출하며, 이들이 파키를 선출한다. 이란의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라고 불린다.

 

1979 11월 4,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된 일단의 학생들이 테헤란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추가로 세 명의 인질이 이란 외무부에서 잡혔다. 63명의 인질 중 13명이 2주 안에, 그리고 1980 7월에 한 명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남자 50명과 여자 2명은 444일간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라고 부른다.

 

 

미국 대사관 점거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치기간중의 부정부패 행위 재판을 위해 를 넘기라는 요구를 미국이 거절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했다. 호메이니 지지자들은 대사관을 스파이 소굴이라고 이름 붙이고, 대사관에서 찾아낸 50권 분량의 비밀문서를 공개 출판하였다.

 

1980 2월 23, 호메이니는 이란의 마즐리스가 미대사관 인질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재판을 위해 샤를 이란측에 넘기라고 미국에게 재차 요구했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질구출을 위한 특수작전을 강행했지만이 시도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부족과 어설픈 사전준비급조된 지휘체계 등으로 실행 전부터 삐걱거리다가 타바스(tabas)사막의 혹독한 기상상황에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잔해만 남긴 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이것으로 인해 지미 카터 행정부는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Iran hostage rescue fails in 1980

 

미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에 무기 금수조치 등 제재를 하면서 물밑에서는 중미 니카라과의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매개 삼아 이란에 무기를 팔았다.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로 알려진 이 사건이 1985년 터져나와 레이건 행정부는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이란은 서로를 ‘사탄(악마)’라 부르며 적대시했다.

 

레바논의 신문사인 아쉬시라(Ash-Shiraa) 1986 11 3일 인질교환을 조건으로한 무기 판매를 최초로 보도한다. 그 후 미국의 CIA 공작원이었던 유진 하센퍼스가 니카라과 상공에서 총기를 투하하는 작전 중에 니카라과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란 정부는 아쉬시라의 보도를 인정하였고 결국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1 13일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전략의 일환일 뿐"이라면서도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를 인정하였다. 이후 11 21일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핵심에 있었던 올리버 노스가 사건의 전모를 인정하면서 레이건이 탄핵의 위기까지 몰리는 정치 스캔들로 확대되었다.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이란에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Seyyed Mohammad Khātamī, 1943 9 29 ~ ) 대통령이 집권하면서였다. 온건 개혁파 성향인 그는 1997부터 2005까지 이란의 제7, 8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여성과 이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학생 청년층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유엔 총회에서 ‘문명의 대화’를 역설하며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을 정면 반박하기도 했던 하타미는 경제·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며 빌 클린턴 미 행정부와 거리를 좁혔다.


이란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그러나 이란 내 보수파들의 반발이 거셌고, 2005년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 출신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1956 10월 28 ~ )가 집권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해빙무드도 크게 후퇴했다.

 

그는 공공연한 반 이스라엘주의자로 특히 2005 10월에는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라고까지 하였다. 2006 12월에는 각국의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을 이란으로 초청해 반유대주의, 반시오니즘 회의인 이란 홀로코스트 국제회의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상처도 모르는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다.

 

 

특히 이 시기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부시는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같은 해 미국에 망명한 일군의 이란인들이 이란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란은 더욱 강력한 경제제재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도 2013년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Hassan Rouhani, 1948 11월 12 ~ ) 에게 정권을 내줬다. 그는 2002년 이란 핵개발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2003년 초대 핵 협상 수석대표를 맡았고, 2004년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피하려고 우라늄 농축을 한시적으로 중단했다. 2005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과 수 차례의 논쟁 끝에 핵 협상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주장은 양보할 것은 양보해 제재를 피하면서 핵개발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더 이상 고립을 감내할 수 없게 된 이란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동조 아래 서방과의 핵협상에 적극 나섰다.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 역시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등 중동의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이란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였다. 2013 9월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찾은 로하니와 오바마의 ‘역사적인 통화’가 이뤄졌고 그 해 말 양측은 핵협상의 큰 틀에 잠정 합의했다.

 

오바마와 로하니

US Secretary of State John Kerry (L), US Secretary of Energy Ernest Moniz (2nd L), Head of the Iranian Atomic Energy Organization Ali Akbar Salehi (2nd R) and Iranian Foreign Minister Mohammad Javad Zarif (R) wait with others ahead of a meeting during negotiations on the Iranian nuclear program, at the Beau Rivage Palace Hotel, Lausanne, March 26,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