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일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

산풀내음 2017. 4. 25. 17:15

19686 1,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

 

1968 6 1일 서울시가 수해를 방지하고 현대식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7,533m의 윤중제를 축조하여 한강의 기적이 열매를 맺게 됐다. 이날 오전 1015분쯤 공사현장에서 베풀어진 윤중제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 여명이 참석했다. 윤중제란 여의도 공사 착공에 앞서 1967년 말 김현옥 서울시장이 현장을 둘러보며 「강 가운데 우뚝 솟아 둥그렇게 쌓아 놓은 둑」이란 의미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낱말이다.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강개발’ 휘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여의도 윤중제공사는 서울시 한강개발의 일환으로 2 20일 착공, 1백여일 만에 준공하게 됐다. 시당국은 이 공사를 위해 1 4일 한강건설사업소를 신설, 전 하수과장이던 이종윤씨를 소장으로 기용하고, 50명의 직원을 한강건설사업소 건설요원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한강개발공사는 한강의 한복판에 버려진 달걀모양의 여의도를 개발키로 하고 26억 원의 예산을 책정, 우선 7억 원의 돈으로 여의도 둘레에 제방을 쌓는 윤중제공사를 시작했다.

 

1968년 본격적인 개발이 착수되기 이전의 서울 여의도 전경. 개발 이전의 여의도는 모래톱으로 이뤄진 200만평의 땅이었다.

1968 3월 공사중인 윤중제.

 

서울시는 윤중제 준공을 1968년 말까지 계획했었으나 서울시장의 강한 의지와 한강건설사업소장의 밤낮없는 투지로 예정 기일의 80%를 앞당겨 준공, 한국 기술진의 새기록을 수립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52만 명이 동원되었다. 2030m 폭의 윤중제 위에는 길이 7.5km4차선도로가 마련되었고 둘레에는 15년생 수양버들이 7m 간격으로 1천 그루가 심어졌다. 가로등은 30m간격으로 1개씩 506개가 가설돼있으며 윤중제 강변둘레에는 2m폭으로 367235장의 잔디가 곱게 깔렸다. 윤중제가 완공된 뒤 도로가 건설되고 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여의도 개발이 본격화됐다

 

이날 박 대통령은 「한강개발」이란 휘호로 새겨진 1m킬로그램의 화강암을 정초하고 김현옥 서울 시장의 안내로 강변2로 시범택지 조성 지구를 시찰했다. 이날 준공식장에는 1백발의 오색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식이 끝난 뒤 서울지구 예비군 13개 중대가 시범 행진을 했다.

 

윤중제 공사에는 작업량에 마라 「보너스」제를 택했기 때문에 하루 1천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인부가 많았고 토사 운반량에 따라 대금을 지불하기 때문에 대낮에도 헤드 라이트를 켜고 과속으로 달리는 통에 5명의 인부가 치여 죽고 10대의 중장비가 못쓰게 됐다.

 

한강에는 대표적인 두 섬이 있었는데 마포쪽에 있는 섬을 밤섬(栗島), 영등포쪽에 있는 섬을 여의섬(汝矣島)이라 했다. 밤섬은 예로부터 뽕나무가 가득해서 양잠(누에고치)을 했고, 여의섬은 그냥 모래섬이었다.

 

여의도가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시기는 일제 시대 때인 1916년에 간이 비행장을 만들면서였다. 활주로도 짧고 면적도 작았다. 그러면서 1929년 본격적으로 정식비행장이 되고 공항은 여의도 전체를 거의 뒤덮는 수준이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여의도 공원 그러니까 예전의 여의도 광장 자리가 여의도 비행장에 활주로였다고 생각하고 있다당시 활주로는 여의도 공원 (前 여의도 광장)의 방향처럼 남북으로 그어진 게 아니라 동서로 그어진 모양이었다.

 

개발 전 여의도 모습. 여의도엔 비행장 활주로가 그리고 여의도로 건너는 샛강에 놓인 다리가 보인다. 멀리 관악산 모습이 보인다. 좌측이 상류고 우측이 바다로 향하는 하류이다.

 

김포공항의 개장으로 민간비행수요는 김포공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공군 역시 성남으로 기지를 이동한다는 계획을 하면서 더 이상 여의도 비행장은 민간공항으로써도 군사공항으로써도 가치가 없게 되었다.

 

여의도가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된 개발역사를 알려면 먼저 제 14대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시장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있다가 1961 5.16이후 최연소 부산시장으로 부임되고 이후 1966년에는 서울시장으로 부임되었고 서울시장이 된 이후 김현옥은 미친 듯이 공사를 밀어붙여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정희대통령은 이런 김시장에 일솜씨를 맘에 들어 해서 신임도가 유별났다.

 

김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 한 해 여름에 서울에는 큰 홍수가 나서 토목정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시장은 한강 정비를 하기로 했다. 김 시장은 애초에 여의도 개발에 관심이 없었는데 제방을 쌓고 육지와 강 사이에 경계를 확실히 하고 보니 그때서야 여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서울시는 재정난도 있었지만 주택난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여의도를 개발하면 엄청난 넓이의 택지가 새로 생기고 거기에 아파트를 지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재정난과 주택난을 해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의도 개발계획을 세운다.

 

1.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 가능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2. 여의도와 마포, 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가설한다.

3.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 한강 홍수 방지는 물론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한다.

 

윤중(輪中)이었던 여의도에 윤중제를 쌓아 더 이상 강물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윤중제 공사에 들어갔다. 윤중제가 완공되고 여의도가 볼록한 모양으로 커지면 건설부가 지시한 한강 본류의 넓이 (1,300m)가 확보 될 수 없었기에 밤섬 폭파는 불가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윤중제 축조에 들어가는 많은 돌이 필요했는데 밤섬 폭파를 통해 얻은 잡석으로 윤중제를 축조하기로 한다. 이윽고 1968 2월 밤섬은 폭파되었고 밤모양을 닮은 밤섬은 현재 우리가 아는 밤섬이 되어버렸다. 밤섬폭파 후 윤중제 축조는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한강의 수위가 올라가는 여름이 되기 전 윤중제를 완공해야 했기에 김 시장은 불도저시장이라는 별명대로 110일만에 윤중제를 축조했다.

 

1968년 폭파 전의 밤섬 모습

1968 2월 폭파 전의 밤섬, 12시 방향은 당인리 발전소. 항공 촬영 서울신문

1968 2 10일 밤섬 폭파공사 김현옥 서울시장 서울시 자료

여의도 개발공사의 일환으로 밤섬의 바위, 자갈, , 모래 등을 퍼다가 여의도 제방공사에 쓰려고 밤섬을 제거하려는 계획한바 대로 폭파하기로 했다.

1968 2 10일 밤섬 폭파 모습

 

1968년 여의도 개발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윤중제 완공 후 본격적으로 여의도 개발공사 시공

舊서울대교(現 마포대교)-지금은 마포대교라고 불리는 서울대교는 여의도와 강북을 잇는 최초의 다리

국회의사당 건설 당시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경모습, 멀리 국회의사당이 흐릿하게 보인다.

1970년대 여의도

지금의 여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