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일

456명 탄 중국 여객선 ‘둥팡즈싱’호, 양쯔강에서 침몰

산풀내음 2017. 4. 2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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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명 탄 중국 여객선둥팡즈싱, 양쯔강에서 침몰

 

2015 61일 오후 9 30(현지시각)쯤 중국 양쯔강 중류인 후베이성 젠리(監利)현 인근에서 승객과 승무원 456명을 태운 대형 여객선둥팡즈싱(東方之星, 동방의 별)’호가 침몰했다. 사고 선박은 장쑤성 난징(南京)을 출발해 충칭(重慶)으로 향하고 있었다. 1994 2월 건조됐으며 정원은 534명이다. 승객들은 난징과 창저우(常州), 상하이(上海) 등 지역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하이 여행사가 조직한 50~80세 연령대의 노인 단체여행객도 타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사고 지점의 수심은 15m. 이 매체는 사고 직후 헤엄쳐 육지로 나온 선장과 기관장의 말을 인용해배가 돌풍(회오리바람)에 휘말려 1~2분 만에 전복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둥팡즈싱(東邦之星)호가 침몰할 당시 비슷한 지역에서 운항하던 다른 배는 선장의 침착한 대처로 무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둥팡즈싱호 선장은 기상악화에도 무리한 운항을 했으며, 사고 유람선이 수차례 개조를 거쳤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고가 갑자기 불어닥친 회오리바람 탓이긴 하나 인재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1일 오후 920분쯤 우한(武漢)에서 충칭(重慶)으로 가던 장닝(江寧)호의 이모 선장은 비바람이 거세지자 레이다를 통해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운항 경력이 20년 이상된 그는 속도를 늦추며 대응을 준비했고 이 때 둥팡즈싱((東邦之星)호가 장닝호를 추월해 전방으로 나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장닝호에서 선원이 무전기를 통해우리는 후방에서 운행을 멈췄다고 말하자 몇분이 지나지 않아 둥팡즈싱호에서바람이 더 세졌다는 선원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후 큰 바람이 동서방향으로 불자 장닝호는 방향을 조정하고 전 속력을 다해 빠져 나갔다. 결국 일찍 준비를 했기 때문에 장닝호는 기상악화속에서도 무사했다.

 

장닝호의 이모 선장은 오후 1040분쯤 항해 요건이 충족된 것을 파악, 충칭 방향을 향해 다시 운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방에 나가던 둥팡즈싱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됐고 무전을 쳤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모 선장은 다음날 아침 회사에 상황을 보고하면서 동팡즈싱호의 침몰 사실을 알게 됐다.

 

선박이 악천후를 만날 것으로 예상될 경우 선장은 운항을 중지하거나 항로를 변경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했더라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3일 홍콩 봉황망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상국은 오전 830분부터 사고발생 30분전까지 7차례 황색경고를 발령했다. 둥팡즈시호가 여행 스케줄에 맞춰 나쁜 기상여건에도 무리한 운항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선박의 항로를 보여주는 위성사진 자료에 따르면 둥팡즈싱호는 막판에 90도 이상 방향을 바꿔 운항한 것으로 나와 선장이 대피 노력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 관영 인터넷매체인 펑파이(澎湃)신문은 둥팡즈싱호가 유람선 관광시장이 인기를 끄는 상황에서 수차례 개조됐다고 보도했다. 1994 2월 건조된 둥팡즈싱호는 몇번의 개조로 배 윗쪽의 방화벽과 객실 분포 등이 원래의 설계도와 비교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현재 상황으로 볼 때 선박이 회오리 바람의 원인으로만 침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선체 자체의 문제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사고 당시 정원 초과는 아니었지만, 선장과 기관장 등이 먼저 탈출해 육지로 나왔기 때문에 이 선박도세월호식 대응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양쯔(揚子)강에서 침몰한 여객선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호 사망자는 442명이며 12명 만이 구조되었다. 사망자 442명의 유해는 모두 찾았다. 이는 신중국 성립 이전인 1948 2,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장야호 폭발 사고 이후 가장 큰 선박 사고 피해다.

 

둥팡즈싱(東方之星)호의 침몰은 2014년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수백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점이나 선장이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 세월호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선체가 아직도 진도 앞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반면 둥팡즈싱호 선체는 사고 발생 나흘 만에 수면 위로 인양됐다. 세월호 승객 중 9명은 14개월이 지난 지금도 ‘실종’ 상태에서 구천을 떠돌고 있지만 둥팡즈싱호는 보름도 안 돼 442명의 시신을 모두 찾아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와 둥팡즈싱호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과연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걸까?

 

 

세월호와 둥팡즈싱호 사건이 가장 다른 점은 국가 최고지도자가 곧바로 사고 현장을 찾았느냐 여부에 있었다. 둥팡즈싱호가 침몰한 것은 지난 1일 밤 929분이었고 관영 매체의 첫 보도는 2일 새벽 424분에 나왔다. 이후 중국 지도부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첫 보도가 전해진 지 4시간 만에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특별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가 관영 매체들에 의해 전해졌다.

 

같은 시각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이미 전용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 총리가 전용기 안에서 각 부처 장관 및 전문가와 함께 구조 방안 등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장면은 관영 CCTV를 통해 전국으로 방송됐다. 리 총리는 이날 오전 사고 현장에 도착한 뒤 둥팡즈싱호가 손에 잡힐 만한 곳까지 배를 타고 접근, 현장을 직접 살폈다. 그는 이어 인근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문 잠수부를 모두 소집, 수중 구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잠시 후 낮 1252 65세 할머니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거꾸로 뒤집힌 채 선체 밑바닥만 수면 위에 떠 오른 둥팡즈싱호의 선실 안에 갇혀 있던 할머니는 15시간30분 만에 잠수 구조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 밖으로 나왔다. 이 장면 역시 CCTV로 생중계가 되며 14억 명 중국인을 감동시켰다. 리 총리도 현장에서 이를 지켜봤다.

 

바로 사고 현정으로 달려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는 리커창 총리

 

반면 세월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사고 현장에서 국가 지도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CCTV가 리 총리의 사고 수습 장면 등을 비중 있게 보도한 것은 사회주의 독재국가의 선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장치였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 지도자는 어쨌든 곧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를 진두 지휘했고, 이 과정에서 생환의 기적도 이뤄졌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정부가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는 데 있다. 중국 정부가 사고 발생 72시간이 지나자 곧바로 선체 인양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는 초기 대응 과정에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게 밑바탕이 됐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통제됐고 승객 가족들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은 것은 비판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국은 사건을 신속하게 수습함으로써 국론 분열과 국력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정부가 세월호 사고 발생 시 초기 대응에서 국민의 신뢰를 잃은 뒤론 사고 수습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한 것과 대조된다. 스스로 초래한 업보다.

 

중국이 일사천리로 대형 참사를 덮은 것에 대해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의사 결정 과정과 일당 독재 사회주의 국가의 권위적 행정을 단순 비교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와 둥팡즈싱호는 대형 사고 발생 시 정부의 초기 대응, 특히 최고 지도자가 곧바로 현장을 찾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줬다. 답은 현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