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일

소련-유고 정상 공동성명(베오그라드 선언)

산풀내음 2017. 4. 26. 20:46

19556 2,

소련-유고 정상 공동성명(베오그라드 선언)

 

1955 5 26일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와 악수를 나누고 레닌의 이름으로 국제 노동자 운동을 위해 화해할 것을 요청했다. 독자노선을 취하고 있는 티토에 대한 소련의 이 같은 태도변화에는 양국의 관계단절 이후 7년이 소요됐다.

 

 

1944 9 14일부터 11 24일에 걸쳐 소련붉은 군대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불가리아 인민군은 연합하여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독일 국방군을 공격하여 베오그라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는 등 초기에 유고의 티토와 소련의 스탈린은 사이가 좋았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남동유럽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주둔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1946년 유고슬라비아는 국제공산당 정보기구(코민포름)에 가입하게 된다. 그 뒤로 티토는 스탈린의 결의안을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47년에 무기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한 약속을 소련이 어기자 양국의 관계는 조금씩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다.

 


The Yugoslav leader Josip Tito together with Joseph Stalin and Vyacheslav Molotov in Moscow.

 

이후 스탈린소련에 반대하는 유고슬라비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1948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코민포름 총회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영구 제명 시키기로 결의한다. 코민포름을 탈퇴 당한 뒤 티토는 친소련파, 코민포름에 도움이 되었던 정치인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1949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동시에 티토-스탈린 결별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소련의 모든 경제, 정치, 군사적 원조가 중단된 상태로 엄청난 재정적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1949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 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중국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재정 상황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Josef Stalin and Marshall Tito

 

1955년 소련수상 니콜라이 불가닌을 포함한 고위대표단을 대동한 흐루시초프는 1948년 공산권에서 축출된 유고에 이념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또한 과거 유고에 취했던 도발적인 태도에 대해 사과하고, 이를 1953년 처형된 전 소련 내무장관 라프렌티 베리아의 음모로 돌렸다.

 

6 2일 소련의 흐루시초프 수상과 유고의 티토 대통령은 양국화해의 베오그라드선언(Belgrade Declaration)을 발표했다.

선언은 1. 유고슬라비아는 중국의 대만에 대한 영토권 주장을 지지한다. 2. 유고와 소련은 독일문제의 해결을 지지하며 이 해결은 독일 인민의 소원 및 일반안전보장에 대한 기여와 일치하는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3. 양국 정부는 조약체결을 통하여 독립된 구주집단안보기구를 지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