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4일

전설의 호색가, 카사노바 사망

산풀내음 2017. 4. 30. 16:49

1798 6 4,

전설의 호색가, 카사노바 사망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자유를 더 사랑했다"던 베니스 출신의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 1725 4월 2~1798 6월 4) 1798 64, 체코 프라하의 둑스성()에서 73세로 숨졌다. 죽기 전 자신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탈고, 자신의 존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렸다. 자서전은 노골적인 사랑 묘사로 그의 생존 시 출간되지 못했다.

 

 

'카사노바'라는 단어는 바람둥이, 호색가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그는 평생 유럽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던 모험가이자, 10대에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면서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화학, 철학, 문학에 박식했으며 펜싱과 도박, 춤을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호색가이기도 했다. 평생 수십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자신의 자식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걸 알고 속으로 웃기도 한 인물이다. 180cm가 넘는 큰 키와 남자다운 풍채를 겸비한 그에게 여성들도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의 여성관은 자서전 서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카사노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굴이 반반한 무명 배우들이었다. 어머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아버지를 확인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1743, 성 치프리아누스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로서 길을 걷는다. 당시 그는 생각했다. 성직자가 깨끗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도시 전체가 창녀 촌인데, 그는 보란 듯이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고, 떳떳하다는 듯이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교회는 그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참다 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낸다.

                              

그는 이후 가장 완벽한 직업인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판을 내세워 수많은 여인들을 유혹하였다. 고위층 집안의 부인과 그녀의 딸, 유부녀와 소녀를 가리지 않은 그의 행동은 수많은 남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다. 명문가의 부인들과 만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로마 지배층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자금 줄로 이용했던 것은 도박이었다. 그는 도박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카사노바의 가장 든든한 자금 줄은 양아버지 브라가딘의 지원이었다. 종교 재판관이었던 브라가딘은 갑작스런 발작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의 카사노바가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해서 그를 살렸던 것이다.

 

브라가딘가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일상은 여행이었고, 여행 중 만난 모든 여인을 그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특히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일상적으로 섹스 파티가 유행하였고,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하여 환락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섹스 파티로 인해 카사노바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들 중에는 성직자의 부인, 종교 재판관의 애인 등 고위층들이 많았다.

 

1755. 카사노바는 금지된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관에 의해 체포된다. 속내는,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란 뜻이다. 카사노바는 5년 형을 선고 받고 피옴비 감옥의 가장 더러운 감방에서 가장 더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지상최대의 바람둥이가 일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18개월 후에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라는 글을 남기고 탈옥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방랑이 시작된다. 졸지에 탈옥수의 신분이 된 카사노바는 이후에 오랫동안 베네치아에 돌아가지 못하고 뮌헨과 스트라스부르, 파리, 런던, 페테르부르크를 떠도는 방랑생활을 한다. 물론 가는 도시마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고 러시아에서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대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각 나라에서 받은 인상을 꼼꼼히 회고록에 남긴다.

 

카사노바의 거침없는 모험도 1766년을 기점으로 내리막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액년은 마흔 두 살이라고 한다. 카사노바도 이 나이로 들어설 즈음부터는 더 이상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1766년에 바르샤바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카사노바는 이후에 가는 도시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추방당한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파리에서도 추방당한 카사노바는 탈옥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방랑을 계속한다.

카사노바의 말년은 우울한 나날이었다. 이후에 사면되어서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만, 다시 그 곳에서도 추방당한다. 이미 '정치적 망명자이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카사노바를 반겨줄 도시는 유럽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1785년에 둑스 성의 사서로 자리 잡고 1798년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많은 저서를 남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카사노바는 성의 하인들에게 경멸 당하고 비웃음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