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0일

10환을 1원으로…3차 화폐개혁

산풀내음 2017. 5. 4. 17:32

1962 6 10,

10환을 1원으로…3차 화폐개혁

 

190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을 빼고 한국에서의 화폐개혁은 총 3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중의 한 번은 박정희의 화폐개혁이고 나머지 두 번은 한국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화폐개혁이었다.

 

한국정부는 조선은행이 아닌 한국은행을 새로 발족함으로 구조선은행권을 폐기하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려고 했으나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지역 대부분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북한군은 당시의 조선은행권 천원권(A기호) 원판과 백원권(48A 기호) 원판을 수중에 넣게 된다. 천원권과 백원권 원판을 확보한 북한군은 천원권을 대량으로 찍어내서 전국에 유통한다.

 

북한군의 통화공작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50 8 28일 자로 '대통령 긴급명령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일차로 영남지방 및 제주도 일대의 조선은행권을 우선 정리한다. 그 후 10 25일부터 11 3일까지 10일간 전국적으로 구화폐를 교환해주고, 이후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지만, 한국은 전쟁으로 통화남발이 발생하면서 인플레이션율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한국전쟁 전에 통화량은 560억 원이었는데 1952년 말에는 1조원이 넘었으니 얼마나 인플레이션이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100원을 1환으로 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 동안 사용됐던 일본정부 지폐와 주화, 조선은행권, 원 표시 한국은행권 등의 유통을 금지했다. 이처럼 2차 화폐개혁을 통해 11,367억 원이 발행됐던 구권을 97% 11,066억 원을 회수하기도 했다. 1차 화폐개혁이 1:1의 화폐 교환이었다면 2차 화폐개혁은 화폐의 명칭변경과 함께 명목절하가 이루어진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 6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했다. 100시를 기해 화폐 단위를 ``에서 ``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50환 이하의 소액 은행권과 주화를 제외한 모든 환화(圜貨)의 유통을 전면 금지시키되 예상되는 불편에 대비해 세대당 500원까지는 새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으로 바뀌었던 화폐단위가 9년 만에 다시 ``으로 되돌아왔다. 시행 첫날인 10일은 일요일인데도 은행은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고, 시장 일부에서는 생필품을 사두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영국 화폐회사에 급히 인쇄를 의뢰하는 바람에 `독립문` `득립문`으로, `조폐공사` `조페공사`로 잘못 인쇄되기도 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 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봤다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이 시행되자 이런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었다.

 

미국은 박정희의 '무계획'적이고 비전문가적인 '화폐개혁'에 불같이 화를 냈고, 화폐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봉쇄한 예금계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아예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경제 혼란과 함께 산업계의 자금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해 오히려 경제 침체만 더 가중됐다. 혁명정부 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던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예금봉쇄를 해제함으로, 처음 계획했던 퇴장자금을 끌어내 군사정부의 재정적자를 막겠다는 박정희식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와 같이 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조정하는 것을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고 한다. , 100원을 1원으로 조정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리디노미네이션은 주로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인 선진국보다는 역동적인 경제발전 등의 영향으로 물가상승이 일어나는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볼 수 있다. 1차 대전후 독일의 경우 1923년의 물가 수준은 10년 전에 비교해서 무려 10억배나 상승했다고 한다. 마르크화의 가치는 폭락해 돈은 종이 쪼가리에 불가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화폐개혁 밖에 없었을 것이다.

 

Hyperinflation was so severe in Germany in 1923 that it became more convenient for Germans to weigh the marks on a scale than count the currency printed on the bills.

German children playing with bundles of money

 

리디노미네이션의 경우 거래상의 편의성을 증가시키고 인플레이션의 기대 심리를 억제하며 자국통화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나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하의 검은 돈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화폐의 단위만 변경하기 때문에 소득이나 물가 등 국민경제의 실질변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체감지수의 변화에 따라 실질변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500원을 5원으로 바꿨다면 개인의 느낌으로 싸다고 느끼기 때문에 소비가 늘고 또 다시 가격이 인상되는 현상도 가능하고 499원짜리는 원칙저으로는 4.9원으로 바꿔야 하지만 이를 5원으로 바꾼다면 자연스럽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뇌물 등에도 악용될 소지가 있다. 사과상자에 담았던 양이 1/100로 줄어드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