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5일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산풀내음 2017. 5. 8. 20:52

1950 6 15,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간첩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판장 육군 대령 김백일이 차갑게 말했다. 피고석에 선 김수임(1911– 1950)은 열 아홉가지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미군 헌병 사령관 베어드의 동거녀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베어드의 차로 남로당의 거물이었던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기밀을 빼내고 북에서 남로당에 보내는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등 일대 스파이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었고, 1950 6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 1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수임과 이강국

 

1911년 개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11살에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신랑은 15살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집간지 4년만에 김수임은 서울로 도망쳤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독신녀의 수양딸이 되어 성장한다. 이화여전을 다니면서는 시인 모윤숙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고,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의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사교계로 진출했다.

 

그리고 1929년 친자매처럼 지냈던 모윤숙(1910 ~ 1990,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수필가이지만, 친일파이었다)을 따라 감옥에 면회를 갔다가 운명의 이강국을 만나게 되었고 김수임은 첫눈에 반했다. 이튿 날부터 김수임은 이강국의 겨울나기를 위한 옷을 뜨개질하기 시작했고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강국(1906– 1955)은 경성제대 법과 대학생으로 그는 당시 공산주의 활동(원산 총파업 지원활동)으로 함흥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1936년에 발행된 잡지에 소개된 김수임의 모습

 

하지만 이강국은 유부남이었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기에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해방될 무렵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장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병원에 폐렴에 걸린 이강국이 입원하면서 둘은 16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이강국의 본처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함흥에서 당신을 본 이후 한 번도 당신을 잊어 본 일이 없소.”라는 이강국의 사랑 고백에 김수임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둘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이강국은 보름간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강국은 호남형으로 포용력과 겸손 등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당시 10년 후 대통령감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강국이 떠난지 1년이 지나는 동안 김수임은 직장을 반도호텔로 옮겨 통역일을 한던 중 사교 클럽에서 만난 미군 24사단 헌병대장 베어드의 구애를 받고 동거하게 되었다. 김수임은 이화여전 시절의 동료 모윤숙이 미군 상대의 사교클럽으로 조직한 낙랑클럽의 주요 멤버로서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였다. 그에게 매력을 느낀 베어드 대령이 끈질긴 구애 끝에 이 옥인동 집에 김수임과 함께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었다. 해방정국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됐지만 이 집에서의 삶은외면상세상의 흐름과 전혀 관계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엔 아들도 생겼다.

 

오른쪽 맨 뒤에 있는 미군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Col. John E. Baird)과 그 옆이 김수임이고 김수임 옆이 모윤숙이다.

 

이강국이 재차 남한에 내려와 활동하다가 1946년말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를 미국인 고문관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1947년 월북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강국은 김일성 정권에서 초대 외무상으로까지 발탁되었다. 그 뒤 이강국이 대남공작을 펼치자 김수임은 비밀 연락원을 통해 그의 계획에 동조하여 자기 집을 남조선노동당의 비밀 거점으로 사용하도록 빌려주었으며, 자신도 각종 기밀을 빼돌려 남로당에 제공하였다. 한편 남로당의 빨치산책이며, 검거 후 육군 특무대에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던 이중업(李重業)을 비밀리에 빼내 숨겨주었고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 1947년 이강국은 남한에 연락원을 파견했는데, 이때부터 1년 여 동안 이강국의 연락원들을 여러 번 자기집에 숨겼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서울로 운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수임이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이념도,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의 후배였던 수필가 전숙희의 말은 안타까움이 세월을 넘어 뚝뚝 떨어진다. “수임이 언니는 사랑밖에 몰랐어요 너무너무 순진했지요. 자기가 한 일이 뭔지도 몰랐어요. 사람 목숨 하나 구해 준 게 무슨 죽을 죄냐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녀의 꼬리는 쉽사리 수사 당국에 밟혔다. 하지만 미군 헌병대장의 집이란 언감생심 남한의 수사 기관이 쉽사리 치고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역정을 낸 뒤에야 체포 작전이 실행되지만 그래도 미군 헌병대장 집에서 그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끌고 나올 배짱은 돋아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또 한 번 모윤숙이다.

 

3 5일은 모윤숙의 생일이었다. 모윤숙은 “미역국이라도 혼자 먹으려니 네 생각이 나는구나. 와서 같이 미역국이라도 먹자.”고 김수임을 불렀고 그 집 앞에는 수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역국을 떠올리며 모윤숙의 집 앞에 이른 김수임은 삽시간에 눈이 가려지고 재갈 물려져 체포된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모윤숙은 “종달새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는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며,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변호했는데 그 뒤 그녀가 쓴 일기를 보면 그 우정(?)이 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수임은 사형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형이 그릇된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친구 수임은 죽었다 벌써 죽었다. 이 지상에는 없는 수임이다. 저것은 사형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실 모윤숙도 이강국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950 6 15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얼마 후 6.25가 발발했다. 전쟁 발발로 정부는 황급히 후퇴하면서 6 27일 새벽 좌익 관계자들을 마구잡이로 사형시켜 버렸다. 이때 김삼룡, 이주하, 성시백 등과 함께 김수임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집행 장소는 한강 백사장이다, 남산 기슭이다, 육군형무소다 해서 여러 가지 말만 무성할 뿐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김수임의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남북 교환 인사 명단에 김수임을 넣어 김수임을 구출해 보려고 애썼던 이강국 역시 5년 뒤 이번엔 “미제의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사형당한다.

 

그런데 지난 2001 AP 통신은 비밀 해제된 문서 가운데 이강국이 CIA의 협조자로 기록된 문서를 세상에 공개한다. 해방공간에서 미군 헌병대장과 공산당 간부 사이를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등의 수식어가 붙은여간첩 김수임 사건이 실제로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비밀자료를 보면, 베어드 대령은 미군철수 계획에 대한 상세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고, 이 계획의 얼개는 이미 미군 기관지 <성조>에 보도된 것이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특히 미군 정보기관의 자료에 이강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조직인한국공동활동위원회’(JACK)에 의해 고용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강국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미국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이들 문서는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김원일 미국 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 신학교수가 발견해 공개했다. 비밀문서에는 김수임의 사형이 집행된 몇 주일 뒤 미군 수사관들이 미군 장교들을 조사한 결과 김수임의 자백은 서울 당국이 조작한 것이라는 진술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베어드 대령도 김수임 재판에 증거물로 제시된 지프나 군트럭, 라디오 등이 김수임과 관련이 없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문서는 특히 김수임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으며, 미군 철수 내용도 철수 뒤 해고를 걱정하던 미군정 사무실 동료들에게 전달한 것뿐이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