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5일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제2공화국 출범

산풀내음 2017. 5. 8. 21:05

1960 6 15,

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2공화국 출범

 

1960 6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제3차 개헌안이 출석의원 211명 중 찬성 208, 반대 3표로 국회에서 통과, 같은 날 공포됐다. 우리나라 최초 의원내각제의 화려하고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같은 해 3 15일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연일 계속된 시위가가 4·19혁명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4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 1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한국 헌정사상 유일무이하게 내각책임제를 택한 제2공화국은 1960 823일 출범한 장면(張勉) 내각이 이듬해 518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내각 총사퇴를 의결할 때까지 약 9개월간 존속했다. 3차 개헌안에는 헌법상의 명목적인 양원제를 실질적으로 채택하는 내용과 국민의 기본권 강화,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출, 경찰의 중립,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명실상부한 민주헌법이자 자유헌법이었다. 국회는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윤보선을 선출하고, 장면 국무총리를 인준했다.

 

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 취임 선서 중인 윤보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1960 10 1. 2공화국 수립 경축 기념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4·19로 일어나 5·16으로 무너진 제2공화국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꿈꿔온 민주주의 구현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 비운의 공화국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 일변도였다. 박정희 정권하에 이루어진 산업화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을 감싸기 위해 제2공화국을 쿠데타가 없었어도 붕괴하고 말았을 취약한 정권으로 보려 했으며, 이에 맞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길 꿈꾼 이들에게도 제2공화국은 4·19혁명의 성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정권으로 비쳤을 뿐이었다.

 

1990년대 민주당 구파와 신파에 정치적 뿌리를 둔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다원화의 기원을 제2공화국에서 찾아 그 역사적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행정부 수반 장면 총리는 한강의 기적을 역설하였으며, 민주당은 국시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걸었다. , 발전소, 도로건설 등의 대규모 건설을 추진하는 국토건설사업을 계획하고 국민총소득 2%에 맞먹는 400억 환을 연간 예산으로 설정하였으며 장준하의 도움을 받아 국토 건설단을 설립하였다. 한편, 행정부 수반 직속에서 재정금융, 정책조정, 통계조정을 담당하고 각 부처를 평가, 계획하는 경제기획원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정책과 경제관은 박정희정부에서 계승되었다.

 

부산병기창을 시찰 중인 장면 총리

1960. 12. 19. 호남지역을 시찰 중인 장면

1951.2.15. 2대 국무총리시절 해상방송선 시찰차 비행기에서 내린 장면 총리 일행

충주 비료공장 시찰 중인 장면

 

4.19 혁명 이후 검찰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소된 13명 가운데 10 8일 선고 공판에서 유충렬 한 사람에게만 사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나 무죄 등을 선고받아 석방됐다. 이에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서 시위가가 일어났고 10 14.19 혁명 부상학생과 희생자 유가족들에 의한 의사당 난입사건에 일어났다. 그러자 민의원 본회에서는 민주 반역자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제정, 공포하여 다시 검거하였고, 현행법으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혁명입법에 의해 탄생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에게 이를 맡겼다. 동시에 11 29 4차 개헌이 이루어졌다법률을 소급함으로써 4.19혁명에서의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을 위한 특별볍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혁명입법 4대 법률로서 3·15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조직법,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부정축재처리법이 마련되었다.

 


내각책임제였던 제2공화국은 집권당 민주당의 분열로 민의의 분출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

1961 5 20일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이 하야 번의를 발표하고 있다. 맨 뒷줄 오른쪽부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의 모습이 보인다. 윤 대통령은 1962 3 22일 두 번째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도 은퇴선언을 번복해가며 대통령직에 있던 윤보선은 마침내 1962 322일 하야했다.

5·16쿠데타 이틀후인 1961 5 18일 장면은 총리적을 사퇴했다. 황망 중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테굵은 안경까지 잃어버린 채 고별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