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15일

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일본 안보투쟁)

산풀내음 2017. 5. 8. 20:57

1960 6 15,

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일본 안보투쟁)

 

1960 6 15일 미-일 신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일본 데모대가 국회의사당 난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 여학생 1명이 사망했다. 신안보조약은 1 19일 조인됐다. 자유민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에 따라 자민당의 비민주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1960 1, 미일안보조약 체결

 

전학련 주류파 학생 8천여명은 국회 南통용문에 집결해 구내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돌입을 저지하기 위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해 데모대 선두에 있던 한 여학생이 사망했다. 첫 충돌이후 학생들은 돌입을 재시도, 4천명의 학생이 국회 국내로 들어갔다. 결국 이날 저녁무렵부터 16일까지 일어난 충돌로 182명이 체포됐고 중상 43명을 포함해 589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결국 미-일 신안보조약은 6 24일 발효됐다.

 

1960 6 15, 히비야 공원에서 국회로 향하는 시위대

 


한편 1960 6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1960 6,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사진은 미군부대에 도착한 아이젠하워



타이완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패전 후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조직됐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게 됐으며, 직장 단위의 노조 조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의 조직화도 진전됐고, 학생운동도 부활하여 각 대학, 그리고 대학 간의 연대 조직이 결성됐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확립되면서 정치권은 '보수-혁신'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도 각 정당 아래 계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조, 학생조직 등 진보적 단체들은 좌파 정당 아래 계열화되어 그 대중적인 기반이 됐으며 사회운동은 좌파 정당을 정점으로 그 하부에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운동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5 19일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반대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한달 가까이 매일 1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국회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많을 때는 30명 이상이 운집했다. 그리고 이는 일본 시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