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4일

아우토반 건설 공사(公社) 설립

산풀내음 2017. 5. 15. 20:38

1933 6 24,

아우토반 건설 공사(公社) 설립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는 즉시 아우토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명칭은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아우토반 건설을 담당할 공사(公社) 1933 6 24일 설립하고 3개월 뒤에는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간의 제1기 공사를 시작했다.

 

아우토반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1933 9월 아우토반 건설을 위한 첫 삽질을 하는 히틀러

 

아우토반의 최초 구상과 계획, 그리고 부분적인 건설은 1920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꼬임 등으로 베를린주변을 제외한 계획의 대부분은 진행되지 않았다. 제1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 및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당시 전세계에 들이닥친 대공항으로 독일 바이마를 공화국은 대량 실업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3 나치당에 의한 정권이 성립된 후 아돌프 히틀러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두가지를 발표한다. 하나는 자동차 대량 생산 계획으로 1934년에 나온 국민차 프로젝트(Volks Wagen Project)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아우토반 건설 계획이었다. 특히 후자는 공공 사업을 통해 실업률을 잡겠다는 것이었고, 히틀러는 아우토반 건설 총감에 프리츠 (Fritz Todt, 1891~1941)를 임명했다.

 

아우토반의 다리 설계 브리핑에 프리츠 토트 (1891 -1942) 박사, 그 옆에는 히틀러가 있다.

 

히틀러는 아우토반 건설 총감은 총리 직속 자리임으로 선언했고 이에 걸맞는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 우선 교통부로부터 자신의 업무 관련한 권한을 모두 넘겨받게 되는데 교통부는 자동차와 국도에 관련된 업무를 보던 교통부 K과를 통째로 토트에게 넘겨주었다. 또 도로 건설을 위해 필요한 법을 만들 수 있는 입법권까지 요구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각료들의 공공의 적이 된다.

 

공공 사업 덕분에 독일에서는 실업자가 큰폭으로 감소했다. 아우토반 계획은 선전에 이용되었으며 6개월간의 무상 근로 봉사(Reichsarbeitsdienst)를 지운 나치당의 청소년이 여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우토반의 건설은 '새로운 독일의 건설'을 요구하는 나치당에도 적합한 계획이었으며, 또한 국민 의식 고양에도 크게 기여했다. 히틀러는 당시 650만에 달하는 실업 구제에 더하여 1차 대전 때의 패인을 수송능력 부족으로 판단하였기에 전쟁 준비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으로도 아우토반 건설에 집착하였다.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다룸슈타트까지의 최초의 구간은 1935에 개통했다. 이 구간은 1938 독일인 레이스 드라이버 베른트 로즈마이어(Bernd Rosemeyer)의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메르세데스 벤츠 등의 팀에 의해 최고속도 기록 달성을 위해 사용되었다.

 

Adolf Hitler inaugurates the Autobahn.

개통 당시의 아우토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이 전쟁으로 인해 원래 6,000km 수준의 아우토반 건설을 약속했던 프리츠 토트는 4천킬로미터를 채 넘지 못하는 총 공정만을 달성하게 됐다. 특히 그는 소련 침공 이후 제대로 보급 등이 이뤄지지 않자 소련과의 전쟁을 반대했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히틀러에게 전달하고자 폴란드의 라슈텐부르크로 향하던 중 비행기 폭발 사고로 51세의 나이로 1942년 사망하게 되었다.

 

프리츠 토트는 사망 후 히틀러로부터 독일 최고 훈장을 받게 되고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규모로 장례식이 치뤄졌다. 그의 사후 아우토반은 처음에 반대하던 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전쟁용으로 이용이 되었고, 그리고 패망과 함께 그 아우토반의 길을 따라 수많은 독일군들은 수용소로 향하게 되었다.

 

프리츠 토트의 장례식 행렬. 사진=위키피디아

패배한 독일군들이 아우토반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아우토반은 경부고속도로와도 인연이 깊다. 1964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길에 올라 본-쾰른 간 20km 구간을 160km로 달려본 뒤 경부고속도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1964 129일 서독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