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4일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 (베를린 봉쇄)

산풀내음 2017. 5. 15. 20:45

1948 6 24,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 (베를린 봉쇄)

 

소련이 1948 6 24일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공동 관리하는 서베를린이 고립됐다.

 

제2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래 승전 4개국(···)은 독일을 4개로 쪼개어 분할점령 및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전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은 46년 이후로 극에 달하면서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소련은 마셜 플랜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유럽재건부흥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대응을 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 같은 소련의 우려는 1948 3월에 현실화되었다. 미영프 3국이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쓰이는 표준화폐로 독일 마르크화를 채택하며 서독의 경제단위를 통일시키자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베를린

 

서독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베를린에도 새로운 독일 마르크 화()가 도입되었는데 이 조치가 동독의 통화를 위협한다고 본 소련 점령군은 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모든 철도, 도로, 수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6월 24 소련 4대 강국의 베를린 행정위원회가 폐지되었으며 서유럽 연합국에게는 더 이상 베를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6월 26 미국과 영국은 항공편으로 베를린 시에 생필품들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크게 줄어든 서베를린 산업수출품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거꾸로 공수했다. 7월 중순에 이르러 동독 주둔 소련 점령군은 40개 사단으로 늘어났으나 연합국 주둔군은 8개 사단에 불과했다. 7월말까지 3개 편대의 미국 전략폭격기가 영국군을 증강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절박하리만큼 연료와 전력이 부족했지만 공수작전은 11개월 동안 서베를린을 살려주었으며 마침내 1949 5 12일 소련이 봉쇄를 풀었다. 공수작전은 9 30일까지 계속되어 총비용 2 2,400만 달러에 232 3,738t의 식량과 연료, 기계 및 기타 물품을 공급했다. 베를린 봉쇄를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독의 교통통신에 대한 연합국의 대응조치와 더불어 특히 중앙유럽의 모든 전략수출품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봉쇄 덕택이었다.

 

 

결국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 입증시켜주고 말았다. 베를린 봉쇄로 인한 미국의 공수작전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선전현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의 당초 의도와는 반대로 서방 세력은 단결해서 베를린 봉쇄에 맞섰으며, 서방 세력의 대규모 공수 작전으로 서베를린 시민들은 서방 세력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서베를린 내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 계기가 되었다.

 

스탈린은 제대로 체면을 구겼고, 이후 죽을 때까지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회피하였다. 오히려 미국에선 이를 계기로 대소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공수 기간 중 벌어진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이 듀이에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이 작전기간 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7기를 잃고 31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영국은 8대의 수송기와 39명의 파일럿들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