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7일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산풀내음 2017. 5. 19. 18:17

1968 6 27,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 6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The Two Thousand Words, Two Thousand Words that Belong to Workers, Farmers, Officials, Scientists, Artists, and Everybody)’이 발표됐다. 작가 루드비크 바출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이 선언은 소비에트 체제 내의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던 두브체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 이제 대다수 인민은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잃었고, 각자와 각자의 돈만 신경 쓸 뿐이다.(…) 인민들의 유대는 훼손됐고, 더 이상 노동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당의 지배 하에서) 우리의 정신과 체질은 회복될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져왔다.”

 

저 진단 위에서선언은 권력을 독점ㆍ오용해온 강성 보수 정치인 퇴출을 요구했고, 국내 개혁 정책이외세의 개입을 초래할 가능성을 염려하며어떤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썼다. ‘외세(foreign forces)’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즉 브레즈네프 체제의 모스크바였다.

 

루드비크 바출리크(1926.7.23~2015.6.6)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 가운데 루드비크 바출리크가 외부에 덜 알려진 것은 그가 표나게 탄압 받은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벨벳혁명 이후 권력 언저리에 다가서지 않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작가로서 제 이름을 알리기보다 지하출판인으로서 동료 작가들의 작품을 알리는 데 더 힘을 쏟았다.

 

‘2000어 선언은 프라하의 봄의 절정을 알리는 불꽃처럼 체코 인민들을 들뜨게 했다. 너무 들뜬 나머지 며칠 뒤 두브체크가 TV에 나와 시민들의 진정과 단합을 호소했을 정도였다. 반면 국경 너머의 분위기는 판이했다. 2주 뒤 모스크바의 공산당 기관지프라브다에는자유와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체코의 역사를 부정하고, 당의 역할과 조약국간의 유대를 능멸함으로써반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글이라는 한 작가(I. Aleksandrov)선언비판문이 실린다. 사실상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봄은 스탈린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체코의 개혁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응답이었다. 계획경제가 한계상황에 이르면서 인민들의 삶도 팍팍해지던 때였다.

 

1963 2월 경제학자 셀루츠키(Selucky)는 중앙계획경제의 효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계획의 우상화개인의 우상화로 빗대어 계획경제와 스탈린주의를 동시에 공격했다. 같은 해 11월 한 경제세미나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개선책으로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프라하의 봄은 그 무렵부터 징후를 보였지만, 현실로 나타난 것은 두브체크 이후였다.

 

바르샤바조약군이 프라하 중앙광장(현 바츨라프광장)에 진을 친 것은선언이 발표된 지 두 달도 안 된 8 20일이었다. 짧은 봄은 그렇게 졌고 1969 1월 프라하 카렐대 철학부 학생이던 얀 팔라치(J.Palach)가 분신 자살하고 자이츠(J. Zajic)와 플로체크(F.Plocek)가 뒤를 잇는다. 두브체크는 실각했고, 정치적 다원주의와 부분적 시장경제라는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30년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9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탱크에 점령 당한 체코 프라하 광장. 바츨라프 광장이 된 바로 저 곳에서 1969 1월 대학생 얀 팔라치가 분신했다.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