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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서 장도영 중장 등 44명을 반혁명 혐의로 구속

산풀내음 2017. 5. 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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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서 장도영 중장 등 44명을 반혁명 혐의로 구속

 

5.16군사정변 이후 표면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과 혁명내각 수반직에 있던 장도영 (張都暎, 1923 1월 23 ~ 2012 8월 3) 중장의 추종세력 44명이 1961 7 3일 반혁명음모협의로 구속됐다. 이와 함께 같은 날 국가재건최고희의는 장도영 중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을 선출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이름을 바꾸어 발족시킨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행사했던 비상통치기구이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에 발표됐으며, 1963 12월 27 제3공화국(3共和國)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노태우 대위에게 연행되는 장도영() 그리고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장도영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 1월 혁명재판소에서 수의 차림으로 눈을 감은 채 검찰 측의 사형 구형을 듣고 있다.

 

이날의 뉴욕타임즈는 `한국이 강자표면에 나섰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정희 소장이 반공한국의 스트롱맨으로 표면에 나섰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 소장이 지금까지 이면에서만 권력을 행사했으나 당초의 혁명 목표와 반공 공약에는 아무런 변경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고회의가 언제 민간에 정권을 이양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박소장 자신도 조속한 시일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너무도 적은 자원에 너무도 많은 생명들이 매달려 살아야 하는 남한의 운명은 지금 44세인 박정희 소장에게 달려있다."

 

장도영은 1923 1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동양대학 등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귀국해 일제(日帝)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광복 후 국군 대위로 임관했다. 자신보다 4살 위인 박정희와의 인연은 6·25전쟁 이전부터 시작됐다.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 사건에서 박정희 소령이 군내 남로당 세력으로 몰려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자 백선엽 장군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은 특사로 풀려난 박정희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았고, 이후 소령으로 복직시키기도 했다. 장도영은 육군 제9사단장, 6사단장,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 등을 지낸 뒤 제2공화국 때인 1961 2월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당시 민주당내에는 소장파와 노장파 간에 싸움이 치열하였다. 두 파간에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두고 일전을 벌렸다. 노장파 중에서, 특히 국방부장관인 현석호 의원이 적극적으로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으로 밀고 나오자 이철승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그가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다. 현 장관의 강한 지원에 힘입어 그는 육참총장에 발탁되었고, 이후 두 파는 박정희 소장의 인사를 놓고 다시 한 번 일전을 벌인다. 노장파는 박정희의 과거 전력으로 보아서 위험한 인물이기에 그를 군대에서 쫓아 내야 한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소장파 이철승 의원(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이 박정희를 강하게 옹호하고 나섰다.

 

1961 5월 9 5·16 군사 정변 일주일 전 장면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러나, 장도영은 이미 오래 전에 박정희의 쿠데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많다.

 

4.19 혁명을 보면서 더욱 군사반란에 의한 정권찬탈 의지를 다진 박정희는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자신이 군관학교 시절부터 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거사가 성공을 거두기 위한 관건은 육참총장인 장도영을 끌어들이는 일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반란에 대한 진압군 동원을 막을 수 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동기이며 친구이지만 군인의 정치개입과 군사반란에 극력 반대의사를 피력해 온 1군사령관 이한림이 마음에 걸렸다. 전투력과 조직이 강한 야전군이 반란군 진압에 나설 경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사전에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육군 총수인 장도영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4.19 혁명이 나기 전 장도영이 대구에서 2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는 이미 그에게 정권찬탈을 위한 거사의 뜻을 얘기한 바 있었다. 그 때 장도영은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생각을 밝히면서도 "박 장군이 잘 해 보시오"라고 응대했다. 박정희는 그런 장도영이 육참총장에 올랐으니 그를 포섭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61 410일 박정희는 대구 2군사령부에서 상경해 육참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갔고 혁명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고 한다.

 

쿠데타 40년만인 2001년 회고록 <망향>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에 따르면, 장도영 자신은 하루 전에야 쿠데타 움직임을 파악했으며 자신의 쿠데타 지원 또는 방조설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날조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끌려 들어가 듯 쿠데타 진영에 참가한 장도영 육참총장은 쿠데타 성공이 확연해진 5 16일 오후 군사혁명위원회의장과 계엄군사령관직을 공식 수락하고 취임했다. 이어 19일 쿠데타군의 평의회인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했으며 20일에는 임시정부 내각수반과 국방부 장관자리까지 차지했다. 이미 육참총장직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형식상 정부와 군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5.16 당시 장도영 중장()와 박정희 소장()

1961 6 13,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범국민 운동촉진회 의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가재건회의, 중앙에 장도영과 박정희가 보인다.

 

그러나 5·16 발발 후 21일 만인 6 6일 국방장관에서 해임됐으며, 7 3일 국가재건회의 의장직에서도 물러났다. 이어 8월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됐다.

 

김종필이 7 2일 밤 중앙정보부 요원 20여명을 이끌고 중앙청 총리 집무실 옆 별실에 기거하던 장도영을 찾아가 "죄송합니다. 댁에 동행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장 장관이 앉아 있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 왔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나중에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놀라 가지고 '왜 그렇게 했어?'라고 했다" " '혁명을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도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곧 형 면제로 풀려난 뒤 1962년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갔다. 부인 백형숙씨는 "우리 부부가 미시간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교민이나 한국 유학생이 없는 곳으로) 지정해준 것"이라고 했다. 장 전 장관은 '백내과'를 운영하던 부인 백형숙씨 친정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위스콘신대 교수, 웨스턴미시간주립대 정치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장 전 장관은 도미(渡美) 5·16에 대해 줄곧 부정적 입장을 밝혔으나 2011년 한 인터뷰에서 "(박정희·김종필에 대해) 서운한 건 없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