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3일

포항제철 3년3개월 만에 준공식

산풀내음 2017. 6. 1. 20:40

19737 3,

포항제철 33개월 만에 준공식

 

대한민국에 제철소를 만들자는 계획은 이미 자유당 말기 이승만 정부 때이던 1958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공부는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전담부서 ICA(국제협조처) 자금 3000만 달러와 국내 자본 150억 원을 들여 강원도 양양에 연산 20 t 규모의 철강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4·19로 이 계획은 유산되고 이후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잇는다.

 

박 의장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1962 5월 이정림 이양구 남궁연 설경동 등 유수의 재벌을 통해 ‘종합제철민간투자공동체’를 구성한다. 외자 8000만 달러와 내자 30억 원으로 연산 32 t의 공장을 짓고 미국 ‘부르녹스’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조달과 합작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된다. 이후 서독의 Demag, Krupp, GHH 3사로 구성된 DKG조합체와 다시 교섭하였으나 규모가 너무 작고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실패하였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건너가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과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온 뒤로 제철소 건설은 보다 구체화됐다. 이후 생산규모를 50만 톤 규모로 키우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고 세계은행(lBRD)이 건설의 타당성을 인정함에 따라 1966 12월 코퍼스사를 주축으로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한국국제 철강연합'(KISA; Korea l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구성되었다.

 

1967 10 20 KISA가 연산 60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외자 116백만 불을 200일 내에 조달하며, 시일 내에 외자조달에 실패하면 계약을 무효화하는 내용의 종합제철소 건설계약이 체결되었으나 차관 제공자가 없어 무산되었다.

 

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의 강력한 추진을 위하여 사업주체로 국영기업체 형태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를 설립하였고,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자금 73.7백만 불과 경제협력자금으로 수출입은행에서 50.0백만 불 공여의 차관협정이 체결되고, 일본의 야와타제철, 후지제철, 니혼강관 등 3사로부터 기술은 제공받음으로써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70 4 1, 착공

 

1973 69, 이른 아침부터 박태준 사장과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로(용광로) 아래 출선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태양열로 채화한 원화(元火)로 점화로에 불을 지핀 지 어느덧 21시간이 지난 오전7시반, 이윽고 출선구가 열리고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一貫)제철소 고로에서 쇳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3 6 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순간 직원들이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1970 41일 착공 이래 33개월간을 기다려온 그 순간, 사람들은 너나없이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작업을 시작한지 5년 만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방미 때 미국의 제철공장을 둘러본 지 7년 만이었다공사비 만 1215억 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단일사업으로는 단군이래 가장 큰 대역사였다.

 

1973 7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식 이후, 1985 12 5일 광양제출소 건설에 착공하여 1987 5 7일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었으며 1992 10 2일 포항제철소 및 광양제출소 조강 연산 2,080만톤 규모의 종합 준공으로 대역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철강산업이 우리나라의 기반산업으로 본격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73 7 3일 포항종합제철소 1기 설비 준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