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4일

미국 독립선언

산풀내음 2017. 6. 1. 20:58

17767 4,

미국 독립선언

 

1776 7 4일 본국 영국과 갈등을 빚어온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본국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대표들은 필라델피아 식민정부 회의실에서 3차 대륙회의를 갖고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반대해 식민지의 독립국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일제히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종교적 자유를 찾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북미로 온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위해 영국과의 충돌도 감수한 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선언은 본국과 계속적으로 투쟁을 벌여온 식민지 주민들의 의지가 모아진 것이다.

 

 

7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난 1763,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수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한 것이 미국 독립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이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대륙회의를 결성하였다.

 

보스턴 차 사건(1773 12 16)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1774 6월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참을 수 없는 법의 철회를 영국왕에 청원했으나 영국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775 4 18일 매사추세츠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첫 무력충돌이 일어나 식민지인 8명이 전사했다. 한 달 뒤 식민지 대표들은 재차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과의 전쟁을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결정, 조지 워싱턴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776 7 4, 세 번째로 열린 식민지 회의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독립선언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후 2년 반이 지나서야 비로소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식민지의 독립을 반대하는 강한 여론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 이민 1세나 2세여서 모국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식민지 독립은 모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독립주의자들은 이들을왕당파또는보수반동이라고 매도했다. 당시 이들은 전체 식민지 인구의 1/3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 후에도 식민지 연합군보다 영국 편을 들기 일쑤였다. 토머스 페인이상식(The commonsense)’이라는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식민지의 여론분열은 끝내 극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꿈과 자유로 가득 찬 거대한 신대륙이 폭군이 지배하는 조그만 섬나라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하나의상식에 불과하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책은 이성보다는 격정이 앞서 있지만 이 때문에상식은 식민지에서 폭발적인 방향을 일으켰다. 1776 1월에 출판되자 마자 재판을 거듭, 50만부 이상 팔렸다. 이런 영향으로 식민지에서는 반영과 독립의 기운이 부쩍 고무되었고 3차 식민지 회의에서 독립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식민지 회의는 당시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토머스 제퍼슨이 중심이 되어 선언문의 초고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는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는 대원칙을 밝히고 영국 국왕의 부당한 식민지 정책을 열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서론에는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느님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이 포함된다등이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평등, 천부인권, 인민의 동의, 저항권 등 근대민주주의 핵심사상을 이론이 아닌 실천강령으로 선언한 최초의 문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이를 승인한 식민지회의 대표들이 이런 고상한 이념들을 얼마나 마음 깊이 양심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많은 노예를 거느린 남부 농장주들과 노예무역으로 치부한 북부의 상인들도 다수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안자들이 무슨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든 독립전쟁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진실로 독립선언서가 내세우는 고상한 이념을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특히, 민주주의 이상에 고취된 수많은 유럽인들이 자원하여 독립전쟁의 의용군을 나서기도 했다. 이로부터 불과 15년 후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나고 온 유럽이 구체제 타파의 격랑에 휩싸이는 등 세계사에 커다란 변혁이 몰아 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시 "불편한 진실"이었던 노예문제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제퍼슨이 노예제도에 대한 (사적 혹은 공적) 태도와 입장은 동시대인의 시각으로 보아도 애매했던 듯, 젊었을 때는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다가 독립 후에는 "노 코멘트" 입장을 견지한다.

 


독립선언문의 서명, 2달러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