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4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김대중 내란음모혐의로 기소

산풀내음 2017. 6. 1. 21:08

19807 4,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김대중 내란음모혐의로 기소

 

1979 10 26일을 끝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린다.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의 공백기를 노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계엄해제 및 신군부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잦자, 전두환은 5월 초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에게 지시하여 민주화 시위를 제압하고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는 정치인, 재야인사, 복학생 등을 강제 체포토록 했다. 한편 재야 정치단체 국민연합 5 7일과 16일 각각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정치일정 구체화' 정부가 22일까지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80 31일 정부의 2. 29 복권조치로 다시 정치 일선으로 나서게 된 김대중 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국정 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1980 515일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에 집결해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군부는 1980 5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그날 밤 자정이 다 될 무렵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수사요원들에 의해 남산으로 끌려간다.



 비상계엄을 보도하는 신문들. 1980 5월 들어 대규모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잇달자, 신군부는 1980 5 17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치활동이 중지되고, 대학은 휴교됐다. 김종필, 김대중 등 26명이 연행됐고 옥내외 시위, 직장이탈, 파업 등은 불가,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과 관련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밤 10시가 넘어서 초인종이 울렸다.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문을 밀치고 쏟아져 들어왔다. 다짜고짜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경호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경호원이 쓰러졌다. 다른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 서자 역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총마다 검이 꽂혀 있었다. 비서들이 놀라 뛰어나갔다. ‘이 새끼들 까불면 다 죽여버리겠어. 40여명의 군인들이 응접실 쪽으로 몰려들었다. 몇몇은 권총을 들고 있었다. 장교 두 명과 사병 대여섯 명이 내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총구보다 칼이 더 섬뜩했다. 장교 하나가 사납게 말했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내가 되물었다. ‘어디요?’ ‘계엄사란 말입니다.’ 나는 윗도리를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오자 군인들이 양팔을 잡아 끌었다. 잡힌 팔을 뿌리쳤다.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며 따라왔다. …..  그들은 나를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집에 있던 비서와 경호원들도 연행되었다.

 

김대중은 학생 및 노조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되어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측근인사를 비롯해 학생운동 지도자, 노동조합 간부, 종교임 등 26명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체포 관련 계엄사의 발표를 듣고 격분한 광주시민들은 다음날인 518일 거리로 밀려나왔다.

 

광주사태 발발

 

5월 광주항쟁이 광주시민의 피로 얼룩진 이후였던 1980 7 4, 전두환 신군부 계엄사령부는 5.18 광주항쟁의 주동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해 그와 사건 관련자들을 이른바내란음모활동으로 기소하였다. 이것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1980 74일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령부 명의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김대중은 1980 9, 1심 계엄법정(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문응식 소장)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두 달 뒤인 11 2심인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도 항소기각 판결로 사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19811 23일 대법원은 신군부의 사형 판결에 아무런 법률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대법원은 "원심(군사법원 2)이 원용하고 있는 증거들을 기록에 대조하여 살펴보면 피고인들에 대한 이 사건 공소범죄 사실이 모두 인정되고 원심의 법률적용 또한 정당하다"고 결론 내린다. 결국 그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당시 김대중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은 그를 위해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진 바로 같은 날 김대중은 무기로 감형됐다. 무기로 감형된 김대중은 1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됐고 이듬해인 1982 3 3일 다시 무기형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 받았다. 그는 같은 해 11월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1982 12 22일에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간다. 이날 언론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인도주의적 결단"이라는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1980 '5·17 쿠데타'로 영문도 모른 채 일제히 연행돼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묶인 24명은 모진 고초를 겪으며 '동지'가 됐다. 사진은 김대중(가운데 줄 오른쪽 다섯째)이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뒤인 1985년 무렵 한자리에 모인 5.17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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