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산풀내음 2017. 6. 1. 21:02

19727 4,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통일문제에 관해 1972 7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한 성명으로 미국과 중공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실이 7.4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중국이 1964, 67, 70년에 연이어 핵실험, 수소폭탄 실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그 때까지 중국을 인정하지 않던 미국이 입장을 180도 선회하였다. 1971년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였고 곧바로 그 해 10월 유엔총회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승인하였다. 중국은 대만을 대신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1972 2월에는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수상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Zhou Enlai and Nixon in 1972

 

한편 박정희 정부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반공을 내세우며 남북대화와 통일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이 점차 늘면서 국민들 속에서 통일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 승리하고, 연이은 총선에서는 집권당인 공화당이 과반 득표에 실패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여기에 데탕트 노선을 걷던 미국도 남북대화를 하라며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이 1971년 남북회담을 제안했고 한국 정부가 이에 화답, 9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 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1972 5월 평양으로 잠행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다. 이후락은 평양 잠행에서 7.4 남북 공동성명 문안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2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서울을 답방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7.4남북공동성명을 한국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사진은 1972 12 1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공동 위원장 대리 자격으로 청와대를 찾은 박성철(왼쪽)과 박정희 대통령이 악수하는 모습.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통일의 기본 원칙을 합의하였으나 남북관계가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남북 정부의 인식 차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남북이 서로를 국가로 승인하고 국가 대 국가로 통일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7.4공동성명 발표 직후 남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을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가져가자는 것이 영구분단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한 것은 물론이다. 7.4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 날인 7 5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정부 입장을 설명하면서 “국제연합은 외세가 아니다”며 민족자주의 원칙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7.4공동성명은 안타깝게도 남북관계가 다시 대결상태로 들어가며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 시기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6.15공동선언(김대중 정부), 10.4선언(노무현 정부)에도 7.4공동성명의 기본 원칙들은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