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일

강우규 의사, 조선총독에 폭탄

산풀내음 2016. 8. 10. 06:49

19199 2,

강우규 의사, 조선총독에 폭탄

 

1919 9 2일 오후 5, 서울 남대문 역. 조선 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터진다. 폭탄은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의 목숨을 겨냥했다. 사이토는 화를 면했지만 주위에 있던 일본인 3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그 중 경찰과 일본인 기자 2명은 이때의 상처로 목숨을 잃었다.

 

검거된 폭탄 투척자는 놀랍게도 65세의 강우규(姜宇奎)란 이름의 노인이었다.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의사는 이미 50 중반의 나이였으나 가산을 정리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한촌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된다.

 

1919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그 해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침 사이토의 부임소식을 들은 강 의사는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영국제 폭탄 1개를 구입해 서울로 잠입했고, 9 2일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 64.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안중근 20, 윤봉길 24, 이봉창 32. 1960년 통계청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가 51.1, 여자가 53.7세였으니 1919년 당시 환갑을 넘긴 64세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거사 직후 현장을 빠져 나와 이 집 저 집 숨어 다니던 중 9 17일 친일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돼 이듬해 1920 11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리고 강우규 의사는 11월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