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2일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산풀내음 2016. 8. 10. 07:07

1945 9 2,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1945 5 8일 독일의 항복에 이어, 9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1941 12 7일 일본의 진주만기습으로 시작된 3 8개월 동안의 태평양전쟁이 공식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1945 7 26,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하루 전이 7 25일 궁내청 장관인 기도 고이치는 히로히토 일본 왕과 종전(終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한 이보다 앞서 4월쯤에는 모스크바 대사를 통해 평화협상을 추진하고 있었고, 7 13일에 외무장관 토고는주권을 포기하고 특히 천황을 폐위하는 무조건적인 항복이 평화의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이미 항복을 결심한 듯한 정황을 보여주는 대목들 이다.

 

8월 6 히로시마이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틀 후인 8 8일에는 소련이 “9일부터 일본과 전투상태에 돌입한다는 짤막한 선전포고가 있었고 9 0시를 기해 만주지역에 진격하였다. 9일 아침 8 30분부터 일본 수뇌부는 포츠담 회담 선언의 수락을 전제로 한 최고 전쟁책임자 회의를 가졌다. 한참 논쟁이 오가는 중인 9 11시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결국 8 1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 결정되었고 8 14일 히로히토(1901-1989) 일본 왕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1945 815일 정오, 일본 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패전과 항복의 조곡(弔哭)이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 , ,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그러나 히로히토는 패전이라는 말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항복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잔혹한 원자폭탄이 이 전쟁의 종결 이유라고 했다. 나에게는 책임도 반성도 없고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승복이었다. 일본인들의 전통인 듯 하다.



인류의 적이자 전범자 히로히토




히로히토의 방송을 듣고 비통해 하는 일본인들


일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침도 없이 슬픔에 빠져 있었지만 전 세계는 일본의 패망을 기뻐합니다.



8 15일 남산 국기 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모습()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나온 서울역 앞의 시민들()


해방을 기뻐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만세를 부르는 독립 투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


한편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결국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장관이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외교관이었다.

 

마침내 92,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태평양전쟁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여덟 개의 짧은 단락으로 구성된 이 항복문서는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가 작성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를 얻은 문서였다.

 

일본측 대표들이 떠난 후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은 “오늘 총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끔찍한 참극은 막을 내렸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Today the guns are silent. A great tragedy has ended. A great victory has been won)로 시작하는 명연설을 했다. 항복문서는 1945 10 1일부터 미국 국립공문서보관소에서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항복 선언 3일 뒤인 8월 17에는 일본 군정 하에 있었던 인도네시아에서 독립 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8월 18에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항복문서에 서명한 9 2, 호치민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가 이끄는 베트남 제국은 붕괴됐다.


 

연미복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이 시게미쓰 일본 외무대신.


1945 9월 2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일본 항복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