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9일

키신저 극비 중국 방문

산풀내음 2017. 6. 6. 08:12

19717 9,

키신저 극비 중국 방문

 

1949년 이후 20여 년에 걸친 미·중 간 적대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선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북베트남과 휴전교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으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 역시 1969 3월 진보도에서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인 후 미국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다.

 

1971 4, 미국 탁구대표의 중국 방문은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그리고 3개월 뒤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 5월 27~ )가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키신저는 7 3일에 남베트남을 방문한 뒤 8일에는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갑자기 심한 복통이 있어 영빈관에서 쉬겠다며 모습을 감추고 일주일이 지난 7 15일 오후 1030, 닉슨은 라디오·TV를 통해 중대발표를 했다. “중국이 나를 초대했고 나도 세계 평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복통을 핑계로 잠행한 키신저가 7 9일 몰래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타진한 성과물이었다. 그 결과 1972 221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Kissinger, shown here with Zhou Enlai and Mao Zedong, negotiated rapprochement with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the course of his long conversations with Prime Minister Zhou Enlai, Henry Kissinger spoke disparagingly about Japan's untrustworthiness and nationalistic inclinations.

 

1923독일 바이에른 퓌르트에서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Heinz Alfred Kissinger)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2 세계 대전에도 종군하였고, 1943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69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안보 보좌관으로 합류했다. 1973에는윌리엄 P. 로저스 국무 장관이 사임하자 56대 국무 장관이 되었으며, 포드 행정부 때까지 그 직을 맡았다.

 

President Nixon and Henry Kissinger

 

키신저는 현실주의적 외교전략가이자 미국 외교의 산 증인이다. 그는 스스로 ‘미국 국익’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했다고 밝혀왔다. 미·소 데탕트도, 중국과의 비밀 수교협상도 국익을 위해서였고 칠레의 독재자를 지원하고, 캄보디아를 비밀 공습하고,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승인한 것도 국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91973 사이에 그는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북베트남의 외교관들과 비밀적으로 협상을 지도하였다. 1973년에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그 공로로 북베트남 교섭인 레득토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레득토는 수상 거부) 그러나 그 조약은 종이 조각에 불과, 전쟁이 2년을 더 끌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그는 미국 외교의 두 얼굴을 상징한다.

 

US National Security Adviser Henry Kissinger (R) and Le Duc Tho, leader of North Vietnam delegation,

Secretary of State Kissinger met with Egyptian President Anwar Sad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