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9일

남수단, 북수단으로부터 독립

산풀내음 2017. 6. 6. 08:23

20117 9,

남수단, 북수단으로부터 독립

 

18세기에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관리라는 명분하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1년 만인 1956 영국이집트로부터 독립했다. 수단은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가운데 최초의 독립국가가 됐지만,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내전은 독립 전인 1955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수단은 다시 아프리카 독립국가 중 최초로 내전 국가가 됐다. 북과 남은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국가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수단 내전은 130년이 넘는 이집트와 영국의 식민지배, 북부와 남부의 오랜 착취 관계,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의 불균형, 동아프리카 주변국의 정치 상황, 남수단 천연자원을 둘러싼 수십 개 부족과 국제사회의 이권 다툼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다. 다층적이며 너무 오래 지속돼, 때론 원인과 전선마저 불분명한 충돌이었다. 북부 수단 부족끼리, 남부 수단 부족끼리도 서로 싸웠다. 북부의 수단 정권이 남부 내부의 싸움을 부추기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남부 수단은 이집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실상 북부 수단의 식민지였다. 중세에 아랍 부족들이 이집트와 홍해를 건너 수단으로 이주해오면서 수단 북부 지역을 차지했고, 이슬람 문화가 자리잡았다. 천연자원과 농사지을 땅, 그리고 물은 남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믿고 결속력이 약했던 남부 수단은 북부 수단한테노예와 자원의 공급지였다. 이후 이집트와 영국이 수단을 식민지로 삼았는데, 경제·교육·정치 개발 과정에서 북과 남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식민지배에 악용했다. 특히 영국은 20년 동안 북부와 남부에 별도의 행정제도를 운영했다. 북부는 불평등 구조를 이용해 이득을 봤고, 손해는 남부에 전가했다. 북부는 지배 계층, 남부는 피지배 계층이라는 인식도 굳어졌다. 북과 남의 갈등의 골은 화해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독립 전부터 시작된 1내전(First Sudanese Civil War, 1955-1972)으로 백만 명이 죽었다. 결국 1972 2,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부와 북부 수단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수단은 식민지배가 끝난 뒤 내전에 휘말린 아프리카 국가들 중 처음으로 협상으로 평화를 이끌어냈다. 남부에는 남부수단자치지역이 구성됐다.

 

Fighters from the Anya Nya, the separatist army formed during the First Sudanese Civil War

 

그러나 1978에 남북끼리 따로 분리하려고 했다가, 남부 수단에서 석유 및 자원들이 가득 발견되면서 분리문제는 다시 백지화 되었다. 수단의 총수출액 95%를 차지하는 석유는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된 이후 발견됐다. 원유의 80%가 남부에 매장돼 있었지만, 미국 정유기업인 셰브론(Chevron)과 프랑스 토탈(Total)이 채굴권을 허가 받는 과정에서 남부의 의견은 무시됐다. 수단 정부는 대부분의 정유시설을 중부 경계지역에 건설했고, 송유관과 항구는 모두 북부에 건설했던 것이었다.

 

1983년에 수단인민해방군(SPLA, Sudan People's Liberation Army)이 궐기하여 2차 내전(Second Sudanese Civil War, 1983-2005)이 일어났고 20년 이상 내전이 줄곧 지속되었다. 2차 수단 내전은 종족 갈등뿐만 아니라 천연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중대한 원인이 됐다. 수단 수출 소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의 생산지가 남부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나일 강의 지류가 흐르고 강수량이 높은 남부 수단은 물을 이용하기 수월하고 토질도 비옥한 반면 북부는 사하라 사막의 가장 자리에 잡아 척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The second Sudanese Civil War was one of the longest civil wars on record.

 

이 같은 상황에서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오마르 알 바시르(Omar Hassan Ahmad al-Bashir, 1944 - ) 대통령은 서부의 다르푸르를 근거지로 한 반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악명 높은 친정부 민병조직 잔자위드를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저질러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잔자위드는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성폭행하고 수 십 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난민 수 백 만 명을 발생시켰다. 알 바시르는 유엔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이지만, 중국을 버젓이 여행하는 여전히 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Sudan's Al-Bashir vows not to kneel down to ICC 

 

2차 수단 내전은 국제사회의 중재로 2005 1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단 종식됐으며, 남부 자치지역은 6년간의 자치 실시 후 지난 2011 19일부터 분리독립 국민투표가 일주일간 진행되었고 98.8%의 주민 동의를 얻은 결과 북부 수단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했다.

 

참고로 수단 내전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들 중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93 2월 남수단 아요드 지방에서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사진으로 1994퓰리처상 보도사진부문을 받은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독수리'이란 사진이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소녀를 독수리가 지켜보는 장면으로 내전 당시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동시에, 사진 기자로서의 윤리에 대한 논란으로 숱하게 인용한 문제의 사진이다.

 

케빈 카터의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Waiting game for Sudanese Child)(1994)

 

2011 7 9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초대 대통령은 그 동안 수단 부통령으로 있던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가톨릭계이자 1983년 수단인민해방군을 세운 존 가랑이 2005년 의문의 헬리콥터 사고로 죽자 2인자인 뒤를 이었던 사람이다. 남수단(Republic of South Sudan)UN(국제연합) 기준으로는 193번째 독립국가이자 유엔 회원국이다(2011 7 14일 가입). 수단(Republic of The Sudan)은 독립 직후 남수단을 국가로 인정하고 남수단의 독립 선포식에 수단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 독립을 축하하는 등으로 문제는 일단락은 되었다.

 

남수단 독립

 

하지만 남수단은 독립 이후에도 내분이 끊이지 않다가, 결국 2년 만에 다시 내전(South Sudanese Civil War, 2013-2015)의 비극을 겪게 됐다. 키르와 마차르는 독립 뒤 각기 대통령과 부통령을 맡았다. 그런데 지난 8월 대통령이 마차르를 부통령 자리에서 내쳤다. 이에 맞서 마차르가 쿠데타를 시도했고, 이것이 현재의 준 내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현지언론인 수단비전은 이번 싸움을 ‘독립투쟁을 이끌던 장군들의 전쟁’이라고 보도했다.

 

키르 대통령()와 마차르 전 부통령()

 

키르는 가랑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SPLA 내에서조차 ‘국가를 이끌기엔 카리스마가 없고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초 마차르는 2015년 정권교체 때 권력을 물려받는 것을 꿈꿨는데, 위기감을 느낀 키르가 부통령에서 내쳐버리며 선제공격을 하자 쿠데타 기도로 반격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예측불허에 돌발행동을 잘 하는 마차르가 이 사태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알 수 없다.

 

이번 대립의 이면에는 두 사람의 갈등, 두 사람을 배출한 종족의 갈등과 함께 지역 갈등도 혼재한다. 마차르는 유전지대인 중북부 종글레이, 유니티주에 둥지를 틀고 정부에 맞서고 있다. 마차르는 현 정권이 독재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면에는 유전 수입을 둘러싼 싸움이 자리잡고 있다.

 

Members of the White Army, a South Sudanese anti-government militia, attend a rally in Nasir on April 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