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9일

나라만을 걱정한 여운형 피살

산풀내음 2017. 6. 13. 19:48

19477 19,

나라만을 걱정한 여운형 피살

 

1947 719일 낮 12시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7월의 뙤약볕을 뚫고 날아간 흉탄은 일생을 나라 걱정으로 보낸 한 거인의 가슴을 검붉은 피로 물들인다. 거인의 이름은 여운형 (1886 5월 25 ~ 1947 7 19) 이다.

 

 

선생은 양반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신학문을 받아들이면서 봉건유제를 과감히 혁파했다. 신주를 땅에 묻고 단발을 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토지를 그들에게 나눠줬다.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1923 국민대표회의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이후 임정을 떠났다.

 

중화민국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 7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 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1936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에도 앞장선 그는 1934년 조선체육회장을 맡아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위원장에 올랐다.

 

1929년 체포되어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 선생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송진우에게 여러 차례 참여를 권유했지만 송은 임정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는 박헌영의 공산주의계 인사들의 좌경화로 본질적인 목적이 변질되었고, 우익계열 인사인 안재홍 등은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게 된다. 그리고 박헌영은 1945 9 6'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변모시켰다. 9월에 진주한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상해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1945 8월 광복 직후 서울 휘문중 교정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여운형

1947 7월 서재필 박사 귀국 당시. 왼쪽 김규식, 가운데 서재필, 오른쪽 여운형.

 

여운형 선생는 한민당계 인사들과 친일파들의 모략으로 미 군정과 처음부터 순탄치 못한 관계를 가졌다. 암살당하기 하루 전인 1947 7 18 '보이스 오브 코리아' 발행인 김용중에게 건네준 자필 영문 서한에서 "(미 군사령관) 하지장군은 악수를 나눈 뒤 내게 첫 질문을 던졌소. '왜놈(Jap)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 대답은 '아무것도 없소' 였소. 나는 그의 질문과 불친절한 태도에 기가 막혔소." 한민당계와 친일 인사들은 여운형에 대해 미 군정에 모함과 비난을 집중했다.

 

그는 초대 대통령을 지낼 수도 있었다. 광복 직후 매일일보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에서 그는 33%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미군정 존 하지 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 차점자는 중국파 김구이고, 미국파 이승만은 3위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된 조국’이었다. 여운형은 우익의 이승만, 좌익의 박헌영,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등이 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발로 뛰고 또 뛰었다. 일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마자 둘로 갈라진 강토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김일성을 찾아가기도 했다.

 

북에 다녀온 것을 트집잡는 미국을 향해서는 “집주인이 제 집에서 아랫방으로 내려가건 윗방으로 올라가건 손님들이 웬 참견인가”하고 일침을 놓았다. 이런 여운형에게 미군정은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는 의미로 은도끼(Silver Ax)라는 별명을 붙였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인민공화국이 점차 공산당의 장악 아래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에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새로 조직했다. 그것은 조선공산당과도, 한국민주당과도 다른 정당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당도 공산당의 침투로 그들의 주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은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다. 해방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국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 김구 등 우파 지도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당장 독립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강대국 세 나라가 합의한 것을 받아들이고 일정한 신탁통치를 거친 뒤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면 그것이 현실적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이 여운형의 생각이었고 좌익의 판단이었다.

 

그러던 중 19463월 20, 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지지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주장하였고,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을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 고 하였다. 결국 양측의 입장이 크게 엇갈려 주장을 좁히지 못하고 제1차 미소공동위는 실패로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대표들과 함께 한 여운형. 1946 5.

 

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결렬된 직후 1946 6 3, 이승만이 삼남지방 유세하러 가던 중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이 나온다.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결연히 반대했다. 이에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7,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 좌측 대표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의 성공은 이승만 등 우파인사들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으로서는 여운형이 미 군정과 남북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 여운형의 제거는 좌우 양측이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었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기도가 빈번해졌다.

 

1946 9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의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창립한다. 여운형은 초대 위원장이 되었고 박헌영이 부위원장이 되었지만, 둘은 주도권을 놓고 암투를 벌이게 된다. 여운형은 우익세력과 연대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하였지만, 박헌영은 이를 반대한다. 결국 1946 12월 남로당을 탈퇴하였고, 1946 12 28일부터 1947 1월 8 사이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1947 1월 27에는 반탁운동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7 5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합작운동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1947 5월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다시 공산당 측이 장악했다.

 

1947 5월 21에 제2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공위 개최 이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던 우익진영 정당, 단체들은 미소공위에 협력할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우익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 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

 

1947 5, 2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

 

여운형은 1945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 차례 겪었다. 1929 중국에 있을때 정치테러 2차례, 1945 8월 광복 이후부터1947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 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1947 3월 17 새벽 1시에 여운형의 계동 집이 폭파하면서 가옥이 파괴되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났다"고 증언하여 남로당의 개입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폭파를 한 인물은 백민태로 백민태는 김두한과 친분관계로 훗날 1949년 노덕술 등의 친일파들이 계획한 반민특위 및 정부 요인 암살 사건을 폭로하면서 자수했던 인물이었다.

 

1947 4월 3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 청년들로부터 권총 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위기는 모면하였다. 1947 5월 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하지는 그 해 6월 28자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아놀드 미 군정장관이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을 제의하여 그 임명장을 받으려고 만나러 가는 길에 그는 암살당했다. 여운형이 세상을 떠나자 좌우합작운동, 통일정부 수립운동은 막을 내리고 분단으로, 동족상잔 전쟁으로 가는 광란과 광기만 지배하게 되었다. 여운형이 세상을 떠난 뒤, 백범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북행을 통해 분단을 막아보려 했지만 백범마저 1949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1947 7월 19,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절명하신 곳.

몽양 여운형 선생이 권총 피격 당시 입고 있던 양복상의와 셔츠, 내의.

 

그런데 여운형이 피살된 지 딱 18년 되던 날 1965 719일 이승만도 죽었다. 진정 통일된 조국을 바랬던 여운영 선생과 조국을 이용해 자신의 배만 채운 이승만의 제삿날이 같은 것이다.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 좌익으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매도 당했던 여운형 선생은 2008 2월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에 대한민국장(독립운동 서훈 1)으로 추서되었다.

 


1947 8월 3, 여운형 장례식. 추모인파는 60여만명이 몰려와서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