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9일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산풀내음 2017. 6. 13. 19:53


19527 19,

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인구 36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 7 19일부터 8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38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였으며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종합 2위를 차지하였고,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소련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가 참가했기 때문에 선수촌을 아예 2개로 나누어서 운영했다고 한다.

 

중국은 타이완의 반대로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참관인을 파견하여 비공식적으로 참가했고 타이완은 불참했다. 또 독일은 동, 서독 단일팀 구성을 조건으로 IOC에 가입되었지만 동독이 단일팀 구성에 성의를 보이지 않자 서독만 단독으로 참가하였다.

 



Nina Romashkova Wins Discus Gold - USSR's First Olympic Gold - Helsinki 1952 Olympics 

This scoreboard displays the final score of the 1952 Olympic gold medal men's basketball championship.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Emil Zatopek)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m, 1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라톤 우승자가 다른 종목에서까지 금메달을 차지한 건 올림픽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Emil Zatopek gets a kiss from his wife, Dana, after winning the marathon in the 1952 Summer Olympics.

 

에밀 자토펙은 구두 공장에서 일하던 도중 크로스컨트리대회에 참가해보라는 공장 체육코치의 권유로 19세에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마라톤에 출전한 자토펙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과 마주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지만 고통 뒤에 찾아오는 묘한 쾌감과 희열은 그를 끝까지 달리게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역 대회이긴 했으나 2위라는 값진 성과를 거둔 늦깎이 러너, 에밀은 러닝에 점차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남다른 정신력과 승부욕, 열정으로 무섭게 달려나갔다. 러닝 트레이닝을 진행할 시간이 없던 군 복무 시절엔 군장 차림으로 무거운 플래시, 또는 2kg이 넘는 추를 들고 훈련에 몰두했다. 마라토너의 필수 조건인 심폐지구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는데, 때때로 숨을 참고 달리다 기절하기도 했다는 풍문이 있다.

 

에밀 자토펙은 당대에는 없던 과학적인 러닝 트레이닝법을 창시했다. 구간을 나누되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피로가 충분히 회복되기 전에 다시 달리며 지구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인터벌 트레이닝의 시초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넘나들며 훈련했던 자토펙은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5,00m 10,000m, 마라톤 경기, 총 세 종목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차지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어 금의환향한 에밀 자토펙을 위해 조국, 체코는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에밀은 공산독재 정권의 뜻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부귀영화보다는 자유와 평화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세력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자토펙은 각종 지위를 박탈당하고, 우라늄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약 20년이라는 세월 간 고초를 겪었다. 그야말로 비참한 삶이었다. 1990년 공산 정권이 퇴진한 이후 복권되긴 했으나, 건강 악화로 2000 11월 프라하 국군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1948년 제 14회 영국 런던대회에 7개 종목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역도와 복싱에서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952년 핀란드 헬싱키대회는 6.25전쟁 중에 개최되었는데, 출전 경비 마련을 위한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진행되기도 했고, 육상, 역도, 복싱, 사이클, 레슬링, 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헬싱키올림픽 참가 한국 선수단

 

1960년 이탈리아 로마대회부터 개회식을 비롯한 주요 경기 모습이 TV로 중계되었다. 아시아지역에서 처음 개최된 1964년 일본 동경대회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대결이 예상되었으나, 북한 선수단의 철수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68년 멕시코 멕시코시티대회에서는 우리나라 민속예술단이 한국 전통공연을 선보였다. 1972년 독일 뮌헨대회에는 북한이 첫 출전하였고,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대회에서는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의 양정모 선수가 우리나라에 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겼다.

 

우리나라는 1980년 소련 모스크바대회에 불참하였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1984년 미국 LA대회에 불참하였다. 우리나라는 LA대회에 288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6, 은메달 7, 동메달 7개로 종합 10위를 하였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회에서는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가 손기정 선수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2000년 호주 시드니대회 개회식 때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동반 입장하였다. 2012년 영국 런던대회에서 우리 선수단은 파견 사상 최고의 성적인 종합 5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