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8일

김대중 전(前) 대통령 서거

산풀내음 2017. 7. 14. 17:37

20098 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김대중(金大中, 1924 1월 6 ~ 2009 8월 18) 전 대통령이 2009 8 18일 오후 1 43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렴 후유증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서거했다. 지난달 13일 미열과 감기증세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이후 36일 만이다. 김 전 대통령은 입원 직후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증세가 호전돼 22일에는 일반 병실로 옮기기도 했지만 다음 날 폐색전증이 발병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았고 29일엔 기관절개 수술도 받았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지난 50년간 우리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영남 대 호남’의 경쟁과 대립의 정치구도에도 변화가 일 것으로 전망되었다. 민주당은 김 전 대통령이 자리했던 정치적 구심점의 부재 상태에서 ‘DJ 이후’에 대한 새로운 진로 모색이 불가피하게 됐고, 여권(與圈)도 오랜 세월 DJ를 상대로 삼아 왔던 대야(對野) 노선에 변화를 요구 받게 됐다. 김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를 중심으로 전개돼 민주화와 지역정치라는 공과(功過)를 함께 남긴 ‘3() 시대’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1924(호적상 1925) 전라남도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19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1987, 19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19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15대 대통령(1998 2~2003 2)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1987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1980년에는 5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 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5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19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1992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19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 사회를 구현했으며 2000 6 15일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해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6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23일 영결식이 거행됐다.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장은 1979 10월 재임 중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가 유일했다. 따라서 김 전 대통령의 국장은 역대 두 번째가 되고 전직 대통령으론 첫 국장이다.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23일 오후 2시 국회 본청 앞 광장에서 엄수되었고, 안장식도 같은 날 거행됐다. 국장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조기(弔旗)를 게양했으며,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맡았다.

 

정부는 최규하,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진 전례를 들어 국민장을 권유했지만, 김 전 대통령측과 민주당은 국장을 요구했으며 최종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6일 국장’ 안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