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0일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피습

산풀내음 2017. 7. 15. 05:59

19408 20,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피습

 

 

1940 8 20일 오후 5시 멕시코 코요아칸의 한 저택. 삼엄한 외부 경비와 어울리지 않게 2층 서재에는 트로츠키는 메르카데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고 순간 무장한 수 명의 경호원이 들이닥쳐 메르카데르를 제압하였다. 쓰러져있던 트로츠키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다음 날 영영 세상을 등졌다. 레닌 사후, 구 소련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이국을 떠돌다 이 날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태생 공산주의자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Ramon Mercader, a Spanish communist who had the trust in the Trotsky family. Mercader used mountaineering ice-axe, with which he struck Leon Trotsky and fractured his skull. Leon Trotsky didnt died immediately, was taken to hospital, where he was operated on. He died a day later, at the age of 60.



Mercader was turned over by Trotskys guards to the Mexican authorities. He refused to present his real identity. In 1940, Ramón Mercader was convicted of a murder and sentenced to 20 years in prison. He was released on 6 May 1960. In 1961, Mercader moved to the Soviet Union and was awarded with Hero of the Soviet Union decoration. Ramon Mercader died in Havana in 1978. He is buried under the name Ramon Ivanovich Lopez in Moscows Kuntsevo Cemetery.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론가였던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어식 이름을 따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 11월 7 ~ 1940 8월 21)로 불린다. 영국 런던에서 레닌을 처음 만나 서로 지원군이 되었지만, 점차 레닌의 급진노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이후 온건파인 멘셰비키에 가담하면서 당시 혁명파인 볼셰비키당을 이끌던 레닌과의 관계가 더욱 냉각됐지만 1917년 러시아 민중혁명인 2월 혁명을 계기로 레닌과 다시 손을 잡았다.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하고 초대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1918년 붉은 군대를 창건해 황제파인 백군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트로츠키는 레닌으로부터 2인자 자리까지 제안 받지만 러시아의 뿌리깊은 반 유대계 정서를 의식해 번번이 고사했다.

 

러시아혁명 후, 과실을 둘러싼 동갑내기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암투와 음모가 극에 달했다. 1922년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트로츠키가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그는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지만 오만했고,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은 경멸하기까지 했다. 이에 비해 지적 능력은 떨어졌지만 ‘강철 사나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스탈린은 강한 의지의 냉혈한이었다. 그는 회유와 공포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좌로부터 스탈린, 레닌, 트로츠키

 

1924 1월 레닌 사망과 함께 전세가 역전되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혁명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고 이로써 권력 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1927년 당에서 제명당했고 192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추방 당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고개는 변함없이 꼿꼿했고, 1929년 국외로 쫓겨나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전전하면서도 그의 펜 끝은 언제나 스탈린을 겨냥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우상화와 폭력성, 다른 사상이나 의견을 수용할 줄 모르는 편협성을 지적하였고, 그의 사상이나 정치 활동이 마르크스주의의 인간본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곳곳에 설치된 스탈린을 기념하는 상징물과 찬양 작품 등의 스탈린의 개인 우상화 역시 비판하였다. 특히 그의 마지막 명저라 불리는 배반당한 혁명(1936)’은 소련 인민의 정치혁명을 선동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스탈린이 트로츠키 주의를 완전히 절멸시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1936년부터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고 당연히 1순위는 트로츠키였다. 스탈린은 마침내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열린 궐석재판에서 트로츠키에게 반역주도자로 사형을 언도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특별부대를 편성했다. 그는 가족과 측근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고 로버트 하트라는 미국인에게 암살 미수를 당하기도 했다. 1937년부터는 멕시코에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40 8월 그는 살해 당했다. 소련 정부는 그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였고 암살자는 멕시코 법정에서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

 



망명 생활 중에서 …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한 트로츠기는 1940 2 27일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억압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