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0일

파국을 맞은 체코 프라하의 봄

산풀내음 2017. 7. 15. 06:04

19688 20,

파국을 맞은 체코 프라하의 봄

 

5-7세기에 체크족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 그리고 슬로바크슬라브족은 슬로바키아 지역에 각각 정착하였다. 이 두 종족은 833년 일종의 연방국인 대()모라비아왕국을 세웠다. 모라비아왕국이 쇠퇴하자 체코인들은 895년에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보헤미아왕국을 세웠고 한편 남은 모라비아왕국은 906년 헝가리 마자르족의 침략을 받고 점령당해 이후 1000년간 이 지역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보헤미아왕국은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 치하에서 번성하여 오데르강으로부터 아드리아해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1307년 바츨라프 3세를 마지막으로 프르셰미슬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룩셈부르크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게 되면서 이후 1918년 독립될 때까지 체코인과 슬로바크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5년 민족지도자 마사리크와 베네시는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탄생했다. 당초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할 계획이었으나, 1918 11월 12, 군주제를 폐하고 제국 국호도 폐함으로써 공화국이 되었다. 1968년 기존의 모라비아 지방과 보헤미아 지방이 합쳐져 체크 공화국을 이루고,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되면서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39년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했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런던에 망명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귀국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였다. 1946년의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이 제1당이 되어 당수 클레멘트 고트발트(1946년에 수상, 19481953년에 대통령)가 연립내각을 조직하였지만, 1948 2월의 무혈 쿠데타를 통하여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

 

공산당의 억압적인 정치와 악화되는 경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1968 1 5일 총회에서 안토닌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가 그 자리를 맡았다. 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는 검열제 폐지 등 이른바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개혁을 추진하고,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를 실천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접목시킨3의 방법을 모색했다. 2차 대전 후 독일로부터 해방되고 소비에트체제가 수립된 지 20년 만에 자유의 바람이 프라하에서 불기 시작했다. 프라하의 바람은 소비에트의 정치적 선전처럼 서구제국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된 개혁운동이었다.

 

Alexander Dubček

 

같은 시기에 전세계는 자유의 바람이 강타하면서 혁명적인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학생들의 봉기가 있었고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이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휩쓸던 시기였다. 서구자본주의세계나 소비에트체제는 자유의 바람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던 시기였고 인류에게는 더 없는 희망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소비에트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프라하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에 대해서도 1956년에 부다페스트에서 대응했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12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동독 5개국의 20만 대군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전통고 없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을 앞세워 1968 8 20일 오후 11시 일제히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8 21일 오전 4, 프라하 시내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건물이 소련군 낙하산 부대의 공격으로 점거됐고 수뇌진도 대부분 체포됐다.

 

민중은 저항했다. 마을 이름 표지판을 바꿔, 침략군을 혼란스럽게 했고 이동 라디오에서는 냉정하게 행동하도록 방송했다. 심지어는 탱크의 진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도로가에 서있던 체코 여인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서방향을 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면 몸을 허락하겠다고까지 말했다. 작가들도 국제여론에 호소했으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전쟁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소련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전차 보조탱크에 구멍을 뚫어 유출되는 가솔린에 불을 붙이는 등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프라하를 비롯한 전 국토가 완전 점령됐다. 이로써 1968 1 5일 개혁파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집권하면서 진행된 `프라하의 봄`은 파국을 맞았다.

 








 

두프체크와 그의 지지자들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전략을 포기하도록 강요 받았다. 드프체크는 다시 체코로 돌아와서 자리를 유지했지만 이미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1969 1월 추운 어느 날 젊은 학생 얀 팔라트는 바즐라프 광장에서 분신 자살하며 저항에 불을 지폈다. 두프체크도 결국 1969 4월 구스타프 후사크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고, 두프체크의 모든 개혁은 무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