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6일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ennenberg)

산풀내음 2017. 7. 17. 20:16

19148 26,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ennenberg)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 7 28일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1914 8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에 러시아의 차르는 독일 공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독일군은 개전 초, 프랑스를 먼저 친다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동프로이센 지역은 11보병사단, 1기병사단으로 구성된 제8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러시아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교통과 통신망이 다른 유럽 국가보다 뒤처져 있으므로 군 동원을 완료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하고 동부 전선에서는 1개 군만으로 충분히 러시아군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예측했으나 러시아군은 독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거의 2주 만에 동원을 끝내고 동프로이센 국경에 집결하게 된다.

 

당시 동프로이센으로 집결한 러시아군은 렌넨캄프의 1군과 삼소노프의 2군으로 총 9개 군단과 7개의 기병 사단이었다. 규모로 볼 때 보병은 러시아군이 2배로 많았고 기병은 7배나 수적 우위에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는 독일 8군을 쉽게 격파하고 서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역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동프로이센과 러시아 국경 사이에 위치한 마주리안 호수 지대 2개의 세력이 침공할 경우 약 80킬로미터 이상의 공백 지역을 만들어내어 효과적인 협력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각개 격파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1군 사령관 렌넨캄프와 2군 사령관 삼소노프는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군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기 전 만주의 펑텐(奉天)역에 집결해 있던 1905년의 일이다. 전쟁 당시 기병여단을 이끌었던 삼소노프(Alexander Samsonov)가 우연히 동료 지휘관인 렌넨캄프(Paul von Rennenkampf)와 마주쳤다. 순간 삼소노프는 렌넨캄프의 뺨을 후려쳤고 두 장군은 수많은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흙탕 속에서 격투를 벌였다.

 

이런 추태가 벌어진 이유는 러일전쟁의 격전 중 하나였던 1904년 라오양 전투(Battle of Liaoyang)의 패전 때문이었다. 당시 삼소노프의 부대는 탄광을 지키고 있었고 렌넨캄프의 부대는 인근에 전개해 있었다. 문제는 삼소노프가 일본군에 포위당해 도움을 요청했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렌넨캄프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패하게 된 삼소노프는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렌넨캄프와 마주치자마자 주먹을 날린 것이다.

 

러시아 1군 사령관 렌넨캄프() 2군 사령관 삼소노프()

 

러시아 1, 2군은 사실상 공세가 시작되면서 따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8 15일 독일로 전진했다.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 많은 병력 덕분에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멈춘다. 그의 눈에 독일군은 이미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퇴각한 게 아니라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때 독일은 프리트비츠 장군을 해임하고 지휘관에 퇴역장군이었던 힌덴부르크, 참모장에 개전 초 리에주 공략전에서 활약했던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1916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힌덴부르크 장군과 루덴도르프 장군

 

뒤늦게 8 20일 삼소노프의 2군도 독일로 향했다. 보급철도가 갖춰있지 않아 습지를 걷고 헤쳐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진격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은 러시아 1군과 2군 사이에 유기적 협조가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소 무모한 하지만 과감한 전략적 결단을 내린다. 렌넨캄프와 대치하고 있던 군대를 최소한 만 남겨둔 채 삼소노프 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1914826, 삼소노프가 타넨베르크에 도착해 탈진해 있을 때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5일간의 전투는 차라리 학살이었다. 3만 명의 독일군에 포위돼 25만 명의 군사 중 13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6만 명이 포로가 됐다. 삼소노프는 자살했다.

 

총을 버리고 항복하는 러시아 군인들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인들

 

탄넨베르크 전투를 통해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압력이 해소되면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일군부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개전 초기에 동프로이센 지역 상실을 우려한 독일 지도부는 힌덴부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의 1개 군단을 차출해 동부전선으로 보냈다. 하지만 한 달이 걸려 동부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세가 역전된 상태였고 따라서 다시 서부전선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에서 1개의 군단이 2개월 이상 동안 공백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