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7일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집단학살 사건 발생

산풀내음 2017. 7. 17. 20:29

19668 27,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집단학살 사건 발생

 

홍위병(紅衛兵)의 집단 광기로 인한 집단 학살 사건이 1966 8 27일부터 9 1일에 걸쳐 중국 북경 남부의 대흥현에서 일어났다. 6일간의 학살로 태어난 지 38일된 유아부터 80세 노인까지 325명이 사망했다. 22가구는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1966 5월 16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이었던 72세의 마오쩌둥(毛澤東)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마지막 혁명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수정파의 득세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국가의 정치구조와 전 국민의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4(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세우며 사회 전체에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걷어 내려고 했다.

 

또한 중국의 청년 학생들과 민중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인민민주 독재를 더욱 확고히 실현키 위해 트로츠키주의식의 투철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의 영구적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분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기존 권위에 반기를 들라는 마오쩌둥의 호소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회집단은 학생이었다. 그 해 5월 베이징대에 ‘혁명지식인들이 모두 (혁명)전투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는 대자보가 붙자 마오쩌둥은 “1960년대 베이징의 코뮌 선언”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들불처럼 전국의 학교에 혁명조직이 결성됐다.

 

8 18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가 열리고 있는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모택동으로부터 급진적인 사회 개조 정신을 고무 받은 대학생과 중학생 등 수백만 명이 몰려들었다. 단상에는 마오쩌둥이 자리했고 학생들의 표정에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소조(小組)로만 활동해 오던 홍위병들의 첫 대규모 세() 과시였고 중국 전역을 광란과 파국으로 몰고 간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빨간색은 혁명의 상징인데 빨간색 신호일 때 정지하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우겨댈 정도로 이들의 주장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이들을 막는 세력이 아무도 없었다. 군인과 경찰까지도 이들의 광기를 무력으로 막는 것은 반혁명이라며 두둔하기까지 했다. 중국 전역에는 광신적인 행위가 확산되어갔다.

 

이들이 지나간 곳에는 언제나 피와 나뒹구는 시체뿐이었다. 모택동이 면죄부를 주고 칭찬을 한 문혁 급진파나 홍위병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자는 ‘우사귀신’(요괴가 변화한 것)이지 인간이 아니었다. 지옥 같은 학살사건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문혁 후 공식집계에 따르면 북경 시에서만도 8 24일부터 9 1일 사이에 학살당한 사람이 1529명에 달했다.

 

혁명가 흉내를 내던 홍위병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종말을 맞는다. 각 분파가 정통 마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폭력적인 내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젊고 오만한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67년 홍위병의 해산을 명령했고, 전국에 정규군을 투입했다.

 

모택동과 홍위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