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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

산풀내음 2018. 3. 18. 07:46

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

 

광의로는 1905년부터 1917년까지 발발한 모든 혁명을 포괄하지만, 협의로는 1917년 혁명을 지칭한다.

 

1. 피의 일요일 사건 (1905. 1. 22.)

 

러시아 제국의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05년 이전 몇 년 동안, 특히 굴욕적인 러일전쟁(1904~05)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의 시위로 폭발했다그들의 항거는 자유주의적 의사개진으로부터 파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학생소요와 테러범들의 암살이 포함되었다. '해방동맹'과 연계되어 있었던 이러한 시도들은 '피의 일요일'(1905. 1. 22)에 동궁(冬宮) 앞 광장에 집결해 있던 평화로운 시위군중들을 제국 군대가 무차별 살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총파업이 수도와 산업 중심지에서 뒤따라 일어났으며 비러시아 지역에까지 확대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10 7일에 시작된 철도파업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파업위원회의 구실을 한 '소비에트'는 이바노보보스네센스크에서 최초로 결성되었다.

 

니콜라이 황제는 10월 선언을 통해 사태를 무마하려 하였지만 혁명지도자들은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온건파는 만족스러워했으며, 10월 선언을 승리로 받아들인 많은 노동자들은 작업대로 복귀했다. 이것은 반대파의 제휴를 해체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11월말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이며 멘셰비키인 흐루스탈레프 노사르를 체포하고, 12 3일에는 소비에트 건물을 점거하고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했다.

 

 

2. 2월 혁명 (1917. 3. 8.)

 

제국정권에 결정적으로 타격이 된 것은 제1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장비의 열세와 지휘관들의 무력함으로 인해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다. 전쟁은 2가지 면에서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러시아가 더 이상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상대가 아님을 입증해주었고,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대책도 없이 파탄 직전에까지 몰고 갔다.

 

3 8,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시민의 봉기에는 대다수의 수도경비대도 참여했다. 시민들은 식량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La Marseillaise(프랑스 혁명 노래, , 프랑스 국가)가 불리고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구호는빵을 달라!’에서전제 체제 타도!’로 변화되었고 군인과 경찰들도 시위에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전장에서 그 소식을 접한 니콜라이 2세는내일까지 진압하라.’라는 전보를 보냅니다. 그러나 수도 방위를 맡고 있던 하발로프 장군은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합니다.

 


 

니콜라이 2 3 15일 퇴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제위승계를 거절함으로써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3. 10월 혁명 (볼셰비키혁명, 1917. 11. 7.)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유럽 전쟁 참전을 지지한 임시정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 14,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아닌 오로지 소비에트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을 군대에 지시한 유명한 '명령 제1'를 공표했다. 임시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철회시킬 능력이 없었다.

 

소비에트는 자신들이 실질적인 러시아의 정부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보수파의 쿠데타를 유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자제했다. 임시정부는 3~10월에 4차례나 개편되었다. 최초의 내각은 사회혁명당(SR) 당원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각료들로 조직되었으며, 후속 내각들은 일종의 연립내각이었다. 이 가운데 어느 내각도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제반 문제들, 즉 농민들의 무단 토지점유, ()러시아 지역에서의 소수민족 독립운동, 전선에서의 사기저하 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촌락·군대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소비에트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보다 민중들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소비에트들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참전 중지를 요구하는 패배주의적인 기운이 무르익어 갔는데, 급진사회주의자들이 점차 소비에트 운동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였다. 6 16일에 소집된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최다석을 차지한 단일 블록은 사회혁명당이었으며, 그 다음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다.

 

7월에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 케렌스키는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대혼란에 빠져드는 러시아의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며, 사회혁명당은 좌익의 탈퇴로 인한 심각한 내분사태에 직면했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권력이 쇠퇴해가는 동안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갔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했다가을이 되자 '평화·토지·빵'을 약속하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과, 이미 무더기로 부대를 이탈해 있던 사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비록 7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혁명의 때가 무르익은 듯이 여겨졌다. 11 7일 볼셰비키와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은 정부청사와 전신국 및 기타 전략적 요지를 점거함으로써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저항운동을 전개하려던 케렌스키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은 국외로 망명했다.

 


10월 혁명 당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절규하는 레닌

 

쿠데타와 때를 같이하여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승인했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의장직에 취임했다. 이들은 1918 3월 러시아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1925 12월에 전연방(全聯邦) 공산당으로, 그리고 1952 10소비에트 연방 공산당(Kommunisticheskaya Partiya Sovetskogo Soyuza/KPSS)으로 바꾸었다.

 

볼셰비키(Bolshevik)란 레닌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와 기관지 이스크라편집진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스스로 볼셰비키라는 이름을 썼으며 반대파에게는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Menshevik)라는 이름을 붙였다.